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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Jan 11. 2018

개발자도 디자이너도 아닌 인문학도가 노마드로 사는 법

문과여도 죄송하지 않습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인 문송은 인문학 전공자들이 벌어먹고살기 힘든 세태를 가리키는 자조적 표현입니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학(大學)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이들이 직업을 구하고 경력을 쌓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보다 더 슬픈 것은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 학문을 공부한 일이 죄송한 것이 되어버리는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노마드의 세계에서는 어떨까요? 인문학 전공자들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일조차 어렵고 죄송해야 할까요?


디자이너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흔히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면 개발자나 디자이너 직군을 떠올립니다. 직무 특성상 '공간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프리랜싱과 원격 근무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개발자와 디자이너 직군은 디지털 노마드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코딩과 디자인은 인문학과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문송하지 않습니다.

저도 인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사범대나 교대가 아닌 일반 대학의 교육학과에서 공부했고, 때문에 학교보다 기업의 인사팀이나 교육부서에 취업하는 것을 정석으로 여겼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첫 직장은 대학 전공과 일치했는데요. 약 2년간 기업교육컨설팅 회사에서 사기업의 교육 행사에 외부 강사들을 파견하고, 대학 평생교육원의 몇 개 학과를 운영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수강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온라인 마케팅을 배웠고, 직접 연단에 올라 강의를 한 적도 있네요. 첫 직장이었고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다음 커리어는 스포츠 콘텐츠를 만들어 밥벌이를 하는 회사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제 흥미와 적성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이후의 회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회사 사정으로 인해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 이후 다른 두 곳의 회사에서도 채 2달을 넘기지 못하고 짧게 근무한 뒤 저는 회사를 완전히 떠나 프리랜서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프리랜서로 일할 생각을 하니 가장 먼저 '내가 회사를 떠나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노트북을 펴고 할 줄 아는 것 중에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컨설팅회사에서 배우고 익힌 온라인(블로그) 마케팅 스킬과 강의(강사로서의) 경험, 스포츠 콘텐츠 회사에서 배우고 익힌 페이스북 콘텐츠 제작 노하우와 페이스북 마케팅 스킬, 토탈 90만 정도의 방문자 수를 가지고 있는 축구 전문 블로그와 언젠가 나를 작가로 만들어 줄 미완의 초고 한 부.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굴려가며 가지고 있는 스킬과 자원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던 중, 운 좋게도 지인으로부터 온라인 마케팅에 대한 프리랜싱 제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지점을 낼 예정인 대구 소재 웨딩 프랜차이즈의 온라인 마케팅을 전담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껏 해왔던 일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었던 터라 두렵고 망설여졌지만 '조금은 버거워 보이는 일을 맡아서 해야 실력이 는다.'고 이야기했던 선배 프리랜서의 말을 귀띔 삼아 용감하게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약 1년 6개월 동안 저를 프리랜서의 세계에서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디지털 노마드라는 라이프 스타일을 열망하게 된 것은 첫 프리랜싱을 모두 마친 후의 일입니다. 그동안은 정기적으로 대구 본점과 서울 지점을 오가며 일해야 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웨딩 프랜차이즈와의 계약이 종료된 후에는 간헐적이었지만 블로그 과외를 하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교육컨설팅회사를 다니며 사귀었던 한 분이 지인들을 소개해주셨고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프리랜서로의 '버티기'를 시전 하기 위해 다시는 가지 않겠다던 회사에 잠깐 몸을 담기도 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던 중 낭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브런치북 프로젝트 #3에 제출했던 원고가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삶과 가난하지만 치열한 작가의 삶 중에서 가치 판단을 마친 뒤 다시 한번 회사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모아두었던 돈과 자원들을 첫 책에 쏟아 부었습니다.


첫 디지털 노마드 베이스캠프 완도의 근무 환경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2017년 4월, 저는 첫 책 출간과 함께 그토록 꿈꾸던 작가가 되었습니다. 2017년 12월부터 브런치 위클리 매거진에 브런치북 수상작가 자격으로 목요 매거진 '디지털 노마드 가이드북'을 연재하고 있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10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첫 노마드 베이스캠프인 전라남도 완도에 내려와 에메랄드빛 다도해가 보이는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스킬과 자원들을 십분 활용하며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를 영유하고 있습니다. 축구와 관련된 이력들을 발판 삼아 지난해 말부터 인터넷 방송도 시작했고, 며칠 전에는 아주 오랜만에 블로그 특강 제안을 받아 기분 좋게 커리큘럼을 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게스트하우스의 외주 온라인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며 동네서점 창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제목(개발자도 디자이너도 아닌 인문학도가 디지털 노마드로 사는 법)으로 연재를 기획했을 때는 '번역을 하세요!', '콘텐츠 에디터가 되세요!',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도전해서 작가가 되세요!'처럼 인문학도의 특기와 감성, 적성을 살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디지털 노마드로 살고 싶으면 '코딩이나 디자인을 배우세요!'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코딩이나 디자인을 배우고,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번역을 잘하게 된다면 디지털 노마드로 살기에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문학 전공자들이, 더 넓게는 이제 막 디지털 노마드라는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이 적성이나 흥미와는 상관없이 단지 디지털 노마드로 살기 위해 갑자기 개발이나 디자인을 배우는 것은 올바른 순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내가 지금껏 해왔던 일과 좋아하는 일들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살펴보고, 그게 어렵다면 내 경력을 살려 원격 근무로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는지 찾고, 그마저도 힘들다면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를 위해 새로운 것을 배워보면 어떨까요?


내가 원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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