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이라는 낯선 문

by 켈리황

“팔을 그렇게 들면 어떡해요?”


요가원 안을 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원생이 있는 작은 요가 공간. 그 안에 불편함이 흐른다.


“어깨는 그대로 두고, 상완만 움직이세요.”

속으로 생각한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해 보세요.”
“안 돼요.”
“할 수 있어요. 해 보세요.”

결국 나는 말한다.
“제가 오십견이 있었어서요.”


선생님은 말없이 내 팔을 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돌린다.
“이렇게요. 이렇게 해야 어깨를 강화할 수 있어요.”

작은 공간에 있던 네 명의 공기가 동시에 굳는다.

나 역시 마음이 상했다. 그냥 설명하면 될 걸, 왜 화를 내는 거지?
안 된다고 말했는데, 왜 혼내듯 말하는 거지?


하지만 그 불편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요가를 시작한 지 어느덧 10개월.
동작만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불현듯 올라온 마음을 내려놓고, 수업을 끝까지 따라갔다.


수업이 끝난 뒤, 요가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왜 어깨를 잘못 쓰는 걸 바로잡는 게 중요한지, 오십견 이후 남아 있는 불편함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동작들은 무엇인지. 차분하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날 수업은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땀을 흘리며 동작이 많은 요가에 익숙한 내 기준으로는, 몸이 개운하지 않은 수업이었다.

몸도 마음도 개운하지 않았던 수업.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요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분명히 몸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몸 전체가 유난히 개운했다.

이게 뭐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기분 나쁜 순간은 있었지만, 효과에 대한 의심은 잠시 접고 그 선생님의 수업을 한 번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이번엔 고관절 테라피 수업. 역시 몸을 거의 쓰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누워 있다가 나온 느낌이었다. 물론 수업 이름이 ‘테라피’였고, 지난번 수업은 ‘힐링’이었다. 둘 다 난이도 하.


그런데 이번엔 또 다른 일이 생겼다. 이틀 동안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마치 깊은 곳이 건드려진 것처럼.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몸을 많이 써야 개운하다는 내 생각이, 꼭 맞는 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 이후로 나는 ‘힘든 수업’, ‘땀나는 수업’만 골라 다니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것저것 다양하게 들어보기로 했다.


얼마 전, 송년회가 있었다. 모임 두 시간 전, 운영진 중 한 명이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

“올해 가장 기뻤던 일을 AI 이미지로 만들어 오세요.”


순간, 마음이 올라왔다. 두 시간 전에 공지를 올리다니? 한참 이동 중인데, 이게 말이 돼?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을까? ‘시간이 촉박해서’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요가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그냥 한 번 해볼까.

하다가 정말 싫어지면, 참석만 하자고 마음먹고 GPT와 Gemini로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올 한 해를 관통하는 중요한 통찰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그 내용을 정리해 LinkedIn에 올렸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그 글은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오랜만에 예전 동료들로부터 응원의 메시지도 받았다.


이 일련의 경험들은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기준들을 조금씩 흔들어 놓는다.

“고객한테 언성을 높이다니…”
“요가는 땀을 흘려야 운동이지.”
“두 시간 전에 과제를 내는 건 무례한 거야.”


내 마음속에는 분명한 기준과 판단이 있었다.
그리고 예전의 나는,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들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이번엔 달랐다. 불편했지만, 그대로 한 번 해보았다. 결과는 내 예상과 달랐다.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느낀 개운함, 촉박한 일정 속에서 얻은 통찰.


요즘 나는 ‘이게 맞다’, ‘이건 나한테 안 맞다’라는 생각들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걸 느낀다.

아마도 성장은, 내가 옳다고 믿어온 기준이 완전히 증명될 때가 아니라 그 기준이 조용히 깨질 때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불편함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예전의 나는 불편함을 에너지 소모로 여겼다.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면, 그 감정에 쓰이는 에너지가 나를 더 지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피했다. 불편한 사람, 불편한 상황, 불편한 요청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그 방식은 오랫동안 나를 잘 보호해 주었다.

이미 충분히 많은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굳이 더 소모적인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회피라기보다는, 나름의 에너지 관리 방식이었다.


요즘의 나는 조금 다르다.
불편한 마음이 올라와도 그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예전보다 더 빠르게 알아차리고, 조금 더 수월하게 흘려보낸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전의 나라면 바로 피했을 상황 앞에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도… 한 번 해볼까?


요가 수업에서 그랬고, 송년회 두 시간 전 올라온 공지에서도 그랬다. 처음에는 분명 불편했다. 내 기준과 맞지 않았고, 굳이 나서서 에너지를 써야 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조심스럽게 알게 된 것이 있다. 피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나았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 몸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도 느껴진 개운함, 촉박한 시간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통찰.


이 경험들은 ‘불편함은 피해야 할 것’이라는 내 안의 오래된 기준을 조금씩 흔들어 놓는다. 불편함이 반드시 나를 소모시키는 것만은 아니라는 가능성, 어쩌면 그 안에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방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금의 나는 불편함을 없애는 사람이 되었다기보다, 불편함 앞에서 선택지가 늘어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피하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견디지 않아도 되는 상태.


아직 모든 것이 또렷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다. 머릿속은 여전히 조금 뿌옇고, 언어로 다 담아내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기준들을 조금 느슨하게 쥘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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