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딸 넷의 장녀이자 결혼 안 한 싱글이다. 이런 내게 명절은 시집가란 잔소리를 듣던 때를 제외하곤 참 좋은 시간이었다. 대전에 계신 부모님 댁에 가면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준비하셨고 명절 당일이 지나면 사이좋은 세 자매들도 가족들과 친정으로 모였다.
시댁이 없고 남편, 자녀도 없는 내게 명절은 고향에 가서 맛난 음식을 얻어먹고 쉬기만 하면 되는, 나는 그저 부모님께 얼굴 보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얼마 전부터 고향에 가면 괜히 분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추석에 그 이유를 알았다. 차가 밀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목요일, 9월 8일 새벽 5시에 서울 집을 떠났다. 대전 집에 도착하니 7시 10분경.
집에 도착하자마자 난 아침 준비를 해야 했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신 어머니는 사랑하는 큰 딸이 와도 어떤 음식도 준비하실 수 없었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보니 도대체 뭘 드시고 사셨을까 싶었다.
아침을 준비한다고 하지만, 시집 안 간 딸이 요리는 또 얼마나 잘할까? 짧은 시간 기껏 한 게 조미김을 자르고, 계란 프라이를 부치는 거였다.
"엄마 아빠, 점심에는 내가 맛난 김치찌개 해 드릴게요. 내 김치찌개 실력 알잖아."
겨우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예정된 오전 일들을 마무리하니 점심시간이다.
김치찌개, 당근 라페, 브로콜리 볶음, 한 시간을 부엌에서 음식을 했는데, 아차 김치가 너무 시었다. 정성을 다한 김치찌개는 식초를 들이부은 맛이 났다. 브로콜리 볶음은 식어서 기름 맛이 나고, 그나마 어머니는 당근 라페를 많이 좋아하셨다.
그때부터 동생들이 온 토요일을 제외하고 목, 금, 일 총 아홉 끼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명절은 더 이상 내게 휴식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있고, 시댁에 가야 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겨우 아홉 끼를 하고 이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지만, 그것보다 더 자꾸 생각나는 건 부모님이었다. 그 많은 명절 때마다, 아니 고향에 갈 때마다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셨던 어머니와 일하는 딸이 힘들다고 설거지도 손수 하시던 아버지.
이제 두 분은 기력이 안 돼서 음식도, 설거지도 해 주실 수가 없어지셨다. 급격히 늙어가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 요즘엔 밀키트가 아주 잘 나와. 시켜드릴 테니 밥 하기 귀찮으실 때 해 드셔."
요리 실력이 없는 내가 겨우 해 드릴 수 있는 게 밀키트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해 주신 김치가 떨어진 지 몇 달이 됐고, 늘 김치 냉장고를 사라고 하실 정도로 김치가 넘치던 게 얼마 안 됐다는 게. 어머니가 물으신다.
"김치 떨어졌지?"
"아니, 아직 열무김치 있어. 왜 그런지 요즘엔 김치가 안 먹혀"
김치를 사다 먹는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다. 조만간 고향에 있는 동생들이랑 김치를 담그어야겠다. 사는 김치를 드실 것 같지 않은 부모님을 위해, 그동안 부모님께서 해 주시던 것들을,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때가 온 게 전혀 기쁘지 않다.
글을 쓰다 보니 정신이 든다. 감정과 할 일은 구분해야겠다고. 안타깝고 슬픈 건 감정이지만, 그 감정에 빠져있는 대신, 부모님과 어떤 시간을 보낼지를 고민해야겠다. 부모님과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 행복하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