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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켈리황 Sep 21. 2022

엄마와 나 사이 벽이 무너졌다  

2019년 여름 20여 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했다. 일 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그때, 그동안 못 해 본걸 해 보기로 했다. 30대의 대부분을 외국에 있었기에 첫 번째 결심은 부모님과 살아보기였다.


중년의 딸이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니 걱정, 그래도 자기 앞길 잘 찾아왔으니 안심 등 여러 감정을 부모님들은 겪으셨겠지만, 내겐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쉬어도 된다며 아버지는 나를 안심시키셨다. 


네 딸의 장녀인 나와 부모님과의 관계는 꽤 괜찮았다. 약대를 나와 약사로 있다 시집갈 줄로 아셨던 기대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 댁에 들어가 있겠다 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지옥으로 겁없이 걸어 들어갔다는 걸. 


매일매일 엄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40대 중반의 중년 딸에게, 이십 년 넘게 혼자 살아온 딸에게, 어머니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설거지를 할 때는 옆에 오셔서, 퐁퐁은 한 번만 묻혀라, 그러다 그릇 깨진다, 여자는 설거지도 조용히 해야 한다. 산책을 나가면, 어깨를 펴라, 얼굴 타는 데 선크림은 발랐냐, 티셔츠는 왜 그런 걸 입었냐? 


이십 년 넘게 혼자 살고, 그중 9년을 외국에 살았던 나는 잔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기름기가 많아서 퐁퐁 두 번 묻히는 거야." 

"힘이 세서 설거지할 때 소리가 나는 걸 어떡해." 

"선크림 발랐어. 티셔츠는 이게 편해. 엄마는 티셔츠까지 간섭해야겠어? 나 좀 있으면 오십이라고." 


엄마는 잔소리를, 나는 반박을 쉼 없이 해댔다. 하루에 몇 번씩 나는 얘기했다. 

"엄마, 나 다 컸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불쌍한 아빠가 기센 엄마와 딸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지신다는 것도 몇 개월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녀의 싸움은 폭발했다. 효도한답시고 여수에 모시고 갔고, 저녁은 수산물 시장에 가서 방어회를 먹기로 했다. 시원한 바람, 눈앞에 보이는 바다를 두고 우리는 벤치에 저녁거리를 펼쳐 먹기 시작했다. 


"방어, 하나도 안 신선해. 맛없어." 

"왜, 괜찮은데. 더 드셔 보셔." 

"아냐, 바가지 썼어. 난 못 먹겠다." 

"엄마, 이거 비싼 거야. 좀만 더 드셔 봐. 돈 아깝잖아." 

"싫다. 너나 많이 먹어." 


"엄마는 항상 그래. 어느 식당을 가도 다 꼬투리 잡고. 맘에 드는 식당은 있어요? 도대체 엄마는 사람이 왜 그래? 좋은 거 보고 먹고, 생각하면서 살다가기도 짧은 인생인데, 엄마는 뭐가 늘 그렇게 불만이야?" 


돌아보니 싸움의 시작은 나였다. 기분이 상하신 어머니 언성은 높아지셨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냐?
넌 대학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오고, 배운 게 많은데, 난 배운 게 없어.
너랑 싸우면 내가 평생 말발로 이길 수가 없어.
너 그거 얼마나 서러운지 알아?" 


"그니까 왜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들어. 많이 배운 딸을, 왜 자꾸?" 


싸움은 격해졌고, 어머니가 자리를 뜨셨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어머니를 따라가셨다. 난 가실 테면 가시라지 하며 천천히 자리를 정리했고, 멀찍이 떨어져 숙소로 향했다. 그날 밤, 우린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난 방에 들어가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았다. 부모 자식이 너무 붙어 있었고, 엄마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한 달 뒤 난 문경에 있는 정토 수련원에 있었다. 법륜스님의 4박 5일 "깨달음의 장" 워크숍 참석을 위해. 힘들었던 일정을 통해 내가 깨달은 하나는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얘기를 한다는 것이었고, 뭐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워크숍 후 당시 내게 가장 큰 문제는 엄마와의 관계였고, 이 관계를 다시 봐야겠다 싶었다. 그때부터 엄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일을 하셨고, 항상 자식들 걱정을 하셨다. 이사 간 막내딸이 잘 사는지, 어린 두 딸을 키우는 둘째가 쪼들리지는 않는지, 고등학생 자녀를 둔 셋째가 고생하지는 않는지. 하루 종일 일을 하시거나 걱정을 하셨다. 


며칠을 관찰하다 깨달았다. 엄마의 하루하루가 재미없고, 힘들기만 하다는 걸. 어려웠던 70, 80년대에 열심히 일하고 모으시던 그 삶의 방식을 2000년도 20여 년이 흐른 요즘까지 고수하시고, 변한 세상에 사는 딸들은 엄마가 하는 모든 얘기를 잔소리로 듣고. 어른을 공경하던 옛날에서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변화된 세상은 우리 엄마를 사는 게 뭔가 불편하고, 이유는 모르겠고, 그래서 하던 대로 열심히, 열심히 순간을 살고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는 걸. 


나는 엄마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잔소리가 지나치게 많고, 본인 방식만 옳다고 믿으며,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내 엄마지만 불편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가만히 보니 친구들 엄마 아빠들은 대부분 그랬다. 고집스럽고 잔소리가 많은.


깨달았다. 그게 우리 부모님 세대의 소통 방식이라는 것을. 부모님 세대와 내 세대는 같은 한국어를 쓰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다를 수 있겠다는 것을. 


다시 관찰을 시작했다. 엄마가 어떤 얘기를 할 때, 대화의 내용이 아닌 엄마의 마음을 읽어보기로. 더불어 당분간 엄마의 어떤 말에도 반박하지 않는 시도를 하기로 했다. 어떤 말이든 맞다고 동의하거나, 말도 안 되는 얘기에는 침묵으로 대응해 보기로. 


마음 읽기 + 무조건 예스 + 반박하지 않기


처음엔 침묵하는 순간이 많았다. 결코 동의할 수 없고, 요즘 시대에 맞지도 않는 얘기를 자주 하셨으니까. 


일주일이 흐른 어느 날, 엄마와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저 피부과 잘한다고 소문났는데, 잘하는 것 같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엄마는 늘 부정적이야. 

"그런 것 같네. 나도 특별히 잘한다고는 못 느꼈어." 

"너는 레이저 토닝을 계속해야겠어. 기미랑 주근깨가 너무 많다." 

속으로 생각했다. 또 지적질이다. 

"그렇지, 너무 많아. 선크림 잘 발라야겠어." 


그 순간 엄마와 나 사이에 있던 두꺼운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벽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깜짝 놀랐다. 그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엄마는 고집이 세.'

'엄마는 자기만 옳다고 해.'

'엄마는 자기가 제일 중요해.'

'엄마는 잔소리가 너무 심해.' 

'엄마는 모든 일에 부정적이야.' 


그동안 엄마의 모든 말은 그 벽을 통과해서 내게 들렸던 것이다. 그러니 어떤 말이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렸을까? 


벽이 무너지는 순간, 처음으로 엄마의 말이 제대로 들렸다. 

"날씨가 너무 뜨겁다." 

모든 일에 부정적인 엄마가 또 부정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날씨가 뜨거운 거였다. 


그때부터 내 대화법은 바뀌기 시작했다.

"엄마, 그럼 이쪽 그늘로 갈까?" 


그 전의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안 뜨거운 거지, 뭐가 뜨겁다고 그래?" 


그동안 엄마가 그냥 했던 말들은, 내가 만든 고정관념으로 두껍게 쌓은 벽을 통과했고, 그 말에 나는 반박했다. 부정당했다고 느낀 엄마는 또 반박을 하고, 거기에 난 또 반박을 하고. 


엄마와 나 사이 있던 벽이 무너진 그날 이후로 우린 잘 싸우지 않는다. 기쁜 건, 엄마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다. 매사에 열심이고, 사랑 많은, 요즘 세대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가 이제는 그냥 좋다. 잔소리를 해도 좋고, 먹지도 못할 만큼 음식을 싸 주셔도 좋다. 그게 엄마 세대의 방식일 테니까. 잔소리를 하면 '네, 엄마. 신경 쓸게요.' 대답한다. 음식을 바리바리 싸 주시면, '잘 먹을게. 이거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겠네. 고마워, 엄마.'라고 한다. 예전처럼 '나 이거 다 못 먹어. 남기면 다 버리는 데, 아깝게 왜, 하지 말라는 데, 자꾸 그래.'라고 하지 않는다. 

엄마의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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