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건이 오기 시작했다. 10월 중순에 접어드니 수확물들이 택배로 올라오는 모양이다. 고구마, 배추, 고춧가루 등 무게가 제법 나가는 것들이 오니 움직임도 더뎌진다. 그래도 오늘은 물건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서 쌓을까 하는 고민은 재밌는 놀이 중 하나다. 뭘 그렇게 열심히 쌓냐고 핀잔을 주는 옆 동료의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너무 열심히 쌓았나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테트리스 블럭을 쌓듯이 꼼꼼히 우겨 넣는다.
오늘은 남들보다 큰 물건들이 내게만 유독 많이 왔는지 다들 적재가 끝났는데 나만 계속 물건을 적재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물건을 적재하는 속도가 늦은 게 나만 언덕에서 물건을 적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분류장에 차를 댈 곳이 없어서 비탈길에 차를 대고 적재를 하니 남들보다 빠를 수가 없었다. 조금씩 공간을 양보해주면 내 차도 평지에서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구역을 조금도 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물론 정리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에 따라 필요한 공간은 다르지만 대부분 많이 쓰고 싶어 한다. 그래야 한눈에 볼 수 있고 정리도 쉽게 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래도 근 1년을 비탈길에서 물건을 쌓았으면 이제는 자리를 내줘도 되겠구만,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의 본성은 쉽게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는 중이다. 가뜩이나 물량도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으니까 그만큼 공간도 남을 텐데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빨리 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동료가 지나가면서 아직도 정리를 못했냐는 핀잔을 들을 때면 가끔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
그렇게 오늘도 적재를 하고 배송길에 올랐다. 금요일은 평소보다 물량이 많지 않은 날이기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날이다. 물론 오후 퇴근시간까지 배송을 마치지 못하면 퇴근 지옥에 걸리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어쨌든 그렇게 여유 있게 배송을 하는 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님, 다른 팀으로의 이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이동을 희망하시나요?"
전화를 한 사람은 관리자 실장이었다.
"네, 여전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동 신청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거의 확정적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감사합니다."
타 지역은 신도시 지역이다. 고층 건물이 많아 물동량도 많고 이동거리도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현재 하고 있는 지역보다 이점이 많은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동을 희망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회는 흔치 않은 일이며, 조직 생활의 특성상 경력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1년 된 기사가 신도시로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관리자 실장이 내게 이동을 권유하는 것은, 현재 내가 배송하고 있는 곳이 배송이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이며, 좀 더 나은 곳에서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마도 자신이 채용했기 때문에 좀 더 책임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1년간의 난코스 배송이 끝나고 이제 좀 더 나은 곳에서 배송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오랜만에 마음이 설렜다. 타 지역은 집과도 가까워서 기름값도 절약되고 퇴근시간도 단축되니 여러모로 이득이 많기에 더욱 마음이 간절할 뿐이었다.
1시간 후, 실장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지금 타 지역으로 이동이 거의 확정적인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 지역에 나이가 많은 분을 추천해서 제가 일단 그분을 보류했고, 김 기사님을 적극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와 같은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내부적으로 이 일이 알려지면 골치 아프거든요."
"알겠습니다. 실장님에게 전화가 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평소대로 행동하겠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지역으로 갈 수 있다는 소식에 이미 마음은 신도시 지역에 있는 듯했다.
그리고 2시간 후, 실장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음...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완전히 꼬여버렸어요. 박 팀장과 엄청나게 다투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김 기사님을 타 지역으로 갈 수 있게 최대한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기다려 주세요."
"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나이가 연로하신 분을 제가 보류시켰더니 그 지역 팀장이 현재 김 기사님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 전화를 했어요. 그 팀에서 우리 팀으로 넘어오는 게 맞냐면서 항의 전화를 했나 봅니다. 그것 때문에 박 팀장이 엄청 화가 나서 저에게 따지기 시작한 거죠. 이렇게 마음대로 하는 게 맞느냐면서 김 기사님이 이동하면 그 지역은 누가 커버를 하며, 새로운 사람이 오면 또 언제 일을 가르치며 등등 이 얘기 저 얘기 다 꺼내는 거예요."
실장은 박 팀장과의 설전이 길었는지 횡설수설하며 끝맺음을 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난 후, 불안감이 밀려왔다. 모든 일이 확정되면 팀장에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타 지역 팀장의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처했다.
결국 실장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윗선에서도 관리자가 권한을 남용했다는 질타가 있었고, 팀장들의 의견을 무시했다는 불만이 쏟아졌다고 했다. 사방에서 팀장이 전화를 돌리면서 상황이 알려진 듯했다. 사이가 좋지 않던 두 팀장이 이번 일로 걷잡을 수 없이 싸운 것이었다.
결국 여론은 팀장의 손을 들어줬고, 실장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실장은 내게 사과 전화를 걸어왔다.
"김 기사님께 희망을 드려 죄송합니다. 좀 더 나은 곳에서 일할 수 있게 도와드리려 했는데, 여기까지가 제 능력인 것 같습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데 어쩔 수 없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왜 나는 좀 더 나은 곳에서 일할 수 없는 걸까'라는 자괴감에 빠졌다. 좀 더 직접 나서서 싸웠어야 했나 싶었지만, 이곳은 조직이고 섣부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팀장의 행보에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 이동이 좌절된 후,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마 이동이 없던 일이 된 것을 알고 본인을 원망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듯했다. 팀장은 이어 변명을 했고, 나는 한편으로는 그 변명에 동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그렇게 막을 만큼 중요한 일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실망과 분노, 좌절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팀장은 술 한잔하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고, 나는 수긍했다. 본심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그를 깊게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팀장도 고생하는 사람이고, 함께하고 싶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더 나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내 마음만큼은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동은 불발되었고, 나는 더 나은 곳에서 일하고 싶었던 마음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조직의 복잡한 갈등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언젠가는 더 나은 기회가 올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