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평소처럼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황하며 계기판을 살펴보니, **"ESC 점검 필요"**라는 메시지가 떠 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무슨 문제였더라? 하필 출근길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급히 화물칸 실내등을 확인해 보니, 불이 켜진 채였다. 어제 퇴근하면서 껐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켜둔 것이었다. 방전이 된 것이다.
요즘 출시되는 현대 화물차는 차에서 키를 뽑아도 실내등이 자동으로 꺼지지 않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운전자가 시동을 꺼도 실내 조명을 켜둔 채 작업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한 설계일 것이다.
"시동이 꺼지면 불도 꺼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국 그건 내 기준일 뿐이었다. 제조사의 의도는 달랐던 모양이다.
어쨌든, 긴급출동 렉카를 불러 배터리를 살리고,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한 뒤 출근길에 올랐다. 평소보다 늦긴 했지만,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 애초에 30분 일찍 출근하는 습관 덕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지만, 결국은 습관 하나가 나를 구해준 셈이다.
하지만 평소보다 늦게 도착한 탓에, 내 자리에는 이미 팀장이 대신 들어가 있었다. 결국 나는 차량 입구 쪽 언덕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별것 아닌 실수였는데, 하루 일과를 통째로 바꿔 놓을 줄이야. (물론 팀장과 협의한 사항이었다.)
오랜만에 평소 자리가 아닌 곳에서 일하려니 조금 어색했지만, 예전에 이 언덕에서 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익숙해지긴 했지만, 역시나 언덕에서의 적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하필이면 오늘이 화요일이라니. 물량이 많아 체감되는 피로는 더 컸다. 언덕에서 오르내리며 짐을 싣다 보니, 작은 실수 하나로 인해 아침부터 체력 소모가 배로 늘어난 셈이었다.
나와는 반대로, 팀장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물건을 적재했고, 기운도 넘쳐 보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며 활기차게 움직였고, 마치 날아다니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동료 형님이 내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점검 잘해서 안쪽 자리로 들어가라."
아무래도 팀장이 여기저기 다니며 지적을 마구 쏟아내는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매번 배달을 나갈 때마다 어두운 표정을 짓던 팀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펄펄 날아다니고 있지만, 평소엔 왜 그렇게 지쳐 보였을까?
오랜만에 언덕에서 물건을 적재해 보니, 그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언덕에서의 적재 작업은 말 그대로 죽노동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무거운 짐을 쌓다 보니, 몸이 쉴 틈이 없었다.
‘팀장이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했겠구나.’ 순간적으로 이해가 갔다.
배송을 나서기 전, 차량에 물건을 적재하며 유난히 밝아 보이는 팀장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평소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이는 그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안에서 하시니까 적재도 빠르고 체력도 많이 남으시는 것 같네요?"
"어, 힘이 많이 남네. 내일부터는 차량을 언덕에 세우지 말고 옆에 대고 적재해야겠어."
"그게 가능할까요?"
"해봐야지 뭐."
정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팀장이 나름대로의 전략을 세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후, 분류장에서 모든 물건을 적재한 뒤 배달을 나섰다. 하지만 초반에 체력을 많이 소진한 탓인지, 배달 업무도 쉽지 않았다.
누적된 피로는 판단력을 흐리게 했고,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을 사소한 전화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고객 응대는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 소리는 피로한 몸과 맞물려 은근한 스트레스로 쌓여 갔다.
그렇게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하루 배송을 마쳤다.
문득, 평소에도 이렇게 일하는 팀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도 분명 이런 피로를 매일 견디고 있었겠지.
그 생각이 들자, 언덕에서의 적재 방식이 하루빨리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퇴근하자마자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이번엔 본래 자리로 돌아가 적재를 하며, 익숙한 환경에서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문득, 어제 팀장이 말했던 새로운 전략이 떠올라 혹시 실행했을까 싶어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왠지 변경된 점이 하나도 없었다. 궁금해져 팀장에게 물었다.
"차량을 옆으로 대신다더니, 안 하셨네요?"
"아, 그게... 그렇게 하면 옆 자리 동료가 출발을 못 해서 그래."
"팀장님도 적재가 빠르셔서 크게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그 동료가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어."
"그렇군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마침 문제의 동료가 자신의 자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와 동갑인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니 차량 앞에 옆으로 세우면 될 것 같은데, 안 돼?"
"어, 안 돼."
예상보다 차가운 답변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미 팀장이 한 차례 물어본 분위기였다. 내가 말한다고 해서 안 되는 일이 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언덕에서의 고됨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법도 한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물론, 어쩌면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팀장과의 불화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가끔 팀장도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으니, 그를 신뢰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상황만 놓고 보면, 결국 이해해 주지 않는 동료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끔은 누가 맞고 틀린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속내까지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단순한 계산일 수도, 혹은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 더 배려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겠지만, 그 하나의 선택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결국 두고 봐야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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