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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Mar 08. 2023

'무료 나눔'이라고 해서 제 시간까지 무료는 아니거든요

무료 나눔에서의 에티켓

이사를 앞두고 자잘한 일들로 참 분주하다.  

그중에서도 사람으로 치면 회고록을 작성하듯, 살림을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우리 부부만의 추억을 곱씹으며 회상에 잠기는 것도 잠시,  지난 5년 간 '활용도' 측면에서 선방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아이들은 이 기회에 과감하게 세간 목록에서 제명시키기로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나름 엄격했는지 생각보다 대상이 많다.




총 세 가지 방식으로 구조 조정을 진행키로 한다.   

하나는 '폐기 처분'이다.

그야말로 낡고 오래돼서 우리는 물론이고 남들도 쓰지 않을 것이 자명한 목록이다.

수납력에는 이상이 없지만 외관 시트지가 벗겨진 서랍장, 모서리가 깨진 의자, 스크래치가 많은 스테인리스 볼 등이 그러하다.


두 번째는 '중고 거래'이다.

우리 부부에게만 쓰임이 덜했을 뿐,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사랑을 받을 아이들에 해당한다.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조명 거울, 조금 지겨워진 플로어 스탠드, 예뻐서 샀지만 마땅히 쓸모를 찾지 못한 철제 수납장, 좁은 냉동공간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던 싱글 냉장고 등을 적게는 3분의 1에서 10분의 1 가격으로 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의 이야기 주제인 '무료 나눔'이다.

분명 필요한 사람에게는 쓸모가 있지만 (입장 바꿔서) 돈을 주고 사기에는 조금 아까운 대상이다.

색깔 맞춰 구입한 수 백개에 달하는 옷걸이, 블라인드로 교체하면서 쓸 일이 없어진 커튼 봉 & 나사, 호불호가 있을법한 색상의 차렵이불 등이 그러하다.   


마침 조그만 옷가게를 열었는데 옷걸이가 많이 필요하거나, 자취생이 집에 예쁜 커튼을 달고 싶은데 돈을 아껴야 한다면 분명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다.




"제가 받아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무료 나눔 게시를 하기 무섭게 수 십 번의 알림이 연달아 울린다.

'거봐! 필요한 사람이 이렇게 많다구!!'

고민 없이 가장 먼저 의사 표현을 한 분과 약속 일시를 조율하기로 한다.


"나사가 필요할까요?"

"여자 혼자 들 수 있을까요?"

"차 뒷좌석에 들어갈까요?"

.........


게시글에 부족함 없이 다양한 각도의 사진과 사이즈, 쓰임 정보를 올렸음에도 같은 질문과 답을 채팅을 통해서 반복한다.  심지어 필요하다고 두 손 번쩍 든 사람이 판단해야 할 몫까지도 나에게 떠넘긴다.


무료 나눔이라고 생색낸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 약간의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한 후 어렵게 어렵게 거래 일시를 정했다.


  '오케이, 수요일 오후 3시'


전후로 뭔가를 하기에 애매한 시간대였지만 좋은 마음으로 나누기로 한 거니 상대의 일정에 맞추기로 했다.


'흠...무료 나눔도 할게 못 되는 구만..'


그런데 거래하기로 한 전날 늦은 밤, 상대로부터 또다시 톡이 온다.


"저,, 혹시 내일 오전 11시도 가능할까요?"


이미 확정한 일정 전후로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던 터라 다시금 짜증이 올라왔지만, 오전에 빨리 처리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다시 상대의 의견을 군말 없이 수용했다.


그랬더니,,


"아, 근데 만약에 혹시 그 시간이 안되면 원래대로 3시도 가능하신 거죠?"  


이 대목에서 결국 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 사람, 내 시간을 너무 함부로 생각하고 있잖아???'


나눔 목록이 '폐기 처분' 목록으로 이동되는 순간이었다.

선의로 시작된 무료 나눔에 상상도 못 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생각에 어금니가 깨물어졌다.

커튼 봉이 무료라고 했지,  내 시간이 무료라고 한 적은 없음에도 상대는 너무 뻔뻔하게 내 시간을 자기 시간처럼 함부로 대했다.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영화 속 대사, 교과서에 실려야할 정도의 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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