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그레이 May 01. 2023

부부간 성향차이

당신에게는 아무렇지 않고, 나에게는 상처인 이야기   

결혼 7년 차에 접어든 우리 부부는 여태껏 크게 싸운 적이 없다.

분명, 결혼 당시의 상황은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위태로웠다. 남편은 반 백수나 다름없었고, 나 역시도 경력 피보팅 단계로 고용이 매우 불안한 때였다. 게다가 둘 다 불혹을 앞둔 30대 후반이었다.

얘기만 들어도 갑갑한 커플이 결혼을 했는데, 어떻게 갈등 없이, 심지어 행복할 수 있었을까?  


지난 6년 간의 결혼생활을 돌이켜보건대, 그 주된 이유는 단언컨대 '비슷한 성향'이었다. 



성향 = 사고방식의 경향


전혀 다른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기본적으로 남편과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지향점에서 상당한 공통분모가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 부부는 배달 어플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데, 이유는 명확했다. '배달료'가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방문포장을 하면 '포장 할인'에 더불어 '간단한 운동효과'까지 있으니 우리 부부에게는 돈도 절약하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1석 2조의 선택지였다.  그런데 만약에 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픽업하러 가는 시간'이 더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이 룰은 성립할 수 없게 되고, 부부 마찰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수세미 하나를 교체하더라도 '이왕이면 예쁜 거'를 찾는 성향, 자차보다는 대중교통을 선호하는 성향, 국내외 여행보다는 도심에서의 산책과 쇼핑을 선호하는 성향, 인당 20만 원의 파인 다이닝보다는 1인당 3만 원 선의 가성비 맛집을 선호하는 성향, 유행에는 민감하지만 형편에 맞는 선에서 따라가려는 성향 등 부부가 함께 살면서 수시로 의논 후 결정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 있어  큰 이견이 없었다.


이렇다 보니 누군가에는 '처량해 보일 수' 있는 일도, 우리 부부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은 우리는 여전히 지하철을 이용하고, 아주 가끔 외곽으로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공유카를 렌트한다.  사회적 기준에서 '자가용이 있어야 할 나이'이기는 하지만,  우리 라이프 스타일에는 딱히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차를 구입한 후 발생하게 될 부수적인 비용이 상당히 소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꼭 같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도 한 가지 면에서 '뚜렷한' 성향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건 바로 '인간관계'이다.

말 그대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끊는 것에 대한 기준과 방식이다. 

사실 이 성향은 각자 고유한 방식인 데다,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는 훨씬 쿨~내 진동하는 남편의 인간 관계를 닮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가장 큰 차이는 이렇다.


우선 관계 맺음에 있어, 

나는 '처음부터' '모두에게' '선의를 가지고' 대하는 반면, 남편은 '처음에는' '모두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대한다.

장단점은 명확하다. 나의 경우 그중에 정말로 좋은 사람들과는 진심 어린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반대로 덜컥 좋아했던 상대로부터 크게 배신감을 느끼거나, 상처를 입은 후에야 비로소 관계를 정리한다.  반면,  남편은 그 안에서 '괜찮다고 확신하는 소수의 사람들과만' 선택적으로 밀도 있는 관계를 이어나가니 나처럼 주구장창 상처를 받을 일이 없다.    


관계 유지의 방식도 다르다.

나는 '친하기 때문에' 혹은 '가까울수록' '더욱 조심해서 행동하고' '예쁜 말만 신경 써서 골라서 해야 한다'인 반면, 남편은 (자신이 고르고 고른 사람들이기에)  '친하기 때문에' '가깝기 때문에' '서로를 언짢게 하는 말도 오해없이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이다.  


최근 반복되는 우리 부부 다툼의 원인은 여기서 비롯됐다.




가족 모임으로 연에 최소 4~5번은 외부 식당을 예약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체적으로 내가 주도권을 잡고 진행한다. 성미가 가장 급하기도 하고, 맏 며느리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도 생각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서네의 바쁜 사정 등등을 나름 고려한 처사이다.  식당을 예약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순히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사정, 부모님의 취향, 합리적인 금액대, 블로그 리뷰, 주차, 예약 가부 등의 복합적인 요소를 동시에 고려하여 수십 여개의 후보군에서부터 하나씩 추려야 하는 꽤나 에너지가 드는 작업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렵게 예약에 성공했다고 '대단한 인정'을 바란 행위는 아니었지만 모두를 대신해 수고해 준 걸 적어도 '배려받는 것'을 기대했던 건 사실이다.

그 배려라는 것은 '별다른 불평 없이 한 끼 맛있게 먹어주는 정도'가 전부인 셈이다.


그런데, 남편을 포함한 시댁의 가풍에서는 그보다는 '식당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중요했다.

정확히 판단해야 다음에 또 올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예약을 주도한 모든 식당에 대해 음식 주문을 전후로 해서 이런저런 부정적인 평가가 난무하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소유한 식당이 아님에도 마치 내 안목이나 선택이 비판받는 것만 같아서 가시 방석이 따로 없다.  


속상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울며불며,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도 몇 해째 반복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와 너무 다른 성향을 가진 남편은 내가 읖소하는 내용에 대해 처음에는 공감을 어려워했다. 남편의 변은 '가족이니까' 편해서 가감 없이 솔직한 평을 말했을 뿐이고, 누구를 상처 줄 의도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하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런 상황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게 되면, 아마도 나를 '남을 대하듯 불편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히곤 했다.


?????  (이게 머선 말이고)


근본적인 성향이 다르다 보니, 몇 해째 도돌이표 언쟁이 될 수밖에 없는 터였다.






그런데 살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워낙 많이 받았던 탓일까.

나는 적어도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로부터는 무한한 응원과 사랑만을 받고 싶다.

때문에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좋은 말을 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정말 대단하다', '정말 고생했다', '정말 괴로웠겠다',
'너무 예쁘다' '색깔 잘 어울린다' '너무 재밌었겠다', '덕분에 즐거웠다'...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내가 널 정말 응원하고 아끼고 있다'라는 걸 손쉽게 보여줄 수 있는 말들이다.  


'너도 바쁜데 식당 예약하느라 고생했다'

'네 덕에 이런 식당도 와본다'  


설령 개인적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나나 내가 그동안 맺어왔던 인간관계에서는 식당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무의미'이다. 나를 위한 상대의 '수고'가 훨씬 소중하고 뜻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걸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알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앞장서한 일에 매 순간 '평가를 받는 것' 만큼 곤욕도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선택한 식당에 대해 모두가 미슐랭 평가단으로 돌변하는 것이 아닌,

좋은 날, 온 가족이 모여, 얼굴 마주하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는 걸 알아주는 따듯하고 사랑스러운 표현들이다.  


어느 날, 사랑하는 동생에게 물었다. 너는 살면서 가장 속상했던 때가 언제야? 내가 모르는 동생의 큰 아픔이 있다면 공감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순간, 한 없이 밝기만 하던 동생의 눈에서 짙은 슬픔이 배어 나왔다.
"말하면, 언니 속상할 텐데.."  
그 한 마디에서 이미 형언할 수 없는 큰 충격에 휩쌓였다.
동생이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언니에게 들었던 무심한 말이 일평생 가장 큰 상처로 남아있다고...
이때 알았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일수록 훨씬 깊고, 말할 수 없이 아프다는 것을.



아끼는 물건을 함부로 쓰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아끼는 대상이 사람이라면, 같은 룰이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랑한다면, 소중하다면,, 그만큼 사랑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다름 아닌 '올바른 방식'으로 표현해줘야 하는게 아닐까?  내 성향은  이렇다.


결국, 남편과 내가 이 문제로 반복적으로 싸운다는 것은 각자 일평생 가져온 사고 방식을 한 순간에 고칠 것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깝다.  어쩌면 가장 평화로운 방법은 절대 소수인 내가 남편과 남편 가족의 '성향'에 적어도 '적응하는' 것일텐데, 또 다른 문제는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은 강력하게 거부하는 성향'또한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ㅠㅠ)

   

누군가에는 중요하고,누군가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싸우는 것 만큼 소모적인 행위도 없다.

공평한 싸움이 되려면 둘 다에게 이 문제가 동일한 무게 추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하다. 성향 차이는 인정하거나 혹은 말거나의 문제이지, 타협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전 11화 혼수비용 890만 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