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왕 큰 반려 다이어리

2021년 3월 21일

by 지금을

육공 다이어리라는 것을 샀다. 지인들에게 선물로 받은 졸귀탱 스티커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 작고 귀엽겠지? 하지만 주문 하루 만에 도착한 것은 A5 사이즈의 거대 다이어리 씨. 나는 그렇게 왕 큰 반려 다이어리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사실 다이어리를 주문할 때만 해도 내가 성심성의껏 다이어리를 꾸밀 것이라고는 신뢰하지 않았다. 그동안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꾸준히 써왔지만, 모나미 삼색 볼펜으로 대충 일정을 적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2011년, 마사회 인턴 시절에 쓰던 검정 가죽 다이어리를 펼쳐보자.


‘목금토일 카메라 영상편집 천재가 되기’

‘5.15 - 한국어능력시험 (연차 쓰기)’

‘농협카드 버스비 4만원, 신한카드 학자금 대출이자 12,000원’

‘6.12 - KBS 2차 필기시험’

‘아침 VOD는 1경주 시작 전에, 오후 VOD는 생방송 끝나면 바로 올리기’

‘경마팀 문서함에서 ‘서울경마’와 ‘경마문화’ 예상지 가져오기’

‘이번 주 신과장님 중계 뭔가요?’

‘따봉 b^^d’


참으로 생활감있도다... 2012년에도 2015년에도 2017년에도 내 다이어리의 투박함은 다를 바 없었다. 해서 나의 유일한 MZ 세대 친구인 00년생 동료가 다꾸 유튜브를 보여줄 때마다 그저 입만 틀어막았던 것이다. 금손들의 다꾸는 나에게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탁자에 앉아 선물 받은 스티커들로 거대 다이어리 씨를 꾸미는 순간 깨달았다. 세상은 달라졌다. 스티커와 함께라면 아무리 그림을 못 그려도, 글씨를 못 써도 예쁜 다꾸를 할 수 있다. 가위질을 하고 스티커를 붙이는 데 귀찮은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어깨 춤이 나왔다. 너무너무 예뻐. 이 정도 예쁨이면 종종 스티커에 돈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지 몇 시간 만에 나는 두근두근상점에서 5만 8천 원어치의 다꾸 스티커와 다꾸 테이프와 다꾸 키링을 구매했다. 거대 다이어리 씨 등치에 맞는 키링을 곧 달아줄 생각에 기쁜 마음이다. 충만한 행복감이 단전부터 올라오고 온 신경이 틈만 나면 거대 다이어리 씨에게 향한다.



나는 광고를 보고 쉽게 구매를 하는, 구매전환율이 뛰어난 유저다. 나의 소비 행태는 적금을 더디게 하였으나, 마케터로서 밥벌이 하는데는 큰 장점이 되었다. 사는 마음을 잘 아는 만큼 잘 팔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그러니까 거대 다이어리 씨는 내게 행복을 주는 것만으로도 그 값을 다 하고 있으나, 일할 때마저도 다 쓸 곳이 있을 것이란 그런 이야기다. 진짜룽.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