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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떨림 Aug 15. 2021

"내 동생, 두리야 무지개 다리 잘 건넜니?"

보고싶다, 거기선 아프지 말고 신나게 뛰어 다니렴

나의 동생, 개동생인 두리 이야기를 언제할까 계속 고민하다 이제서야 그 아이와의 추억을 소환 하려한다. 글을 쓰는 내내 눈물만 흘릴것 같아서 망설였는데 역시나 제목을 쓰자마자 나는 울컥 눈물이 흘렀다. 지금 이 세상에 우리가 숨쉬는 이 지구에 두리가 없다는 사실은 아직 믿겨지지가 않는다. 취업한 후로 우리 서로 떨어져 살았지만 항상 엄마 곁에서 이따금 안부를 전했던 두리는, 이제 잘있냐는 안부인사도 전할 수가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우리는 2004년 2월에 만났다. 수능이 끝나고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나의 끈질긴 요구에 엄마는 어쩔수 없이 백기를 들었다. 한 가정에서 다섯 마리의 푸들이 태어나 분양을 하고싶다는 벼룩시장의 광고를 보고 엄마와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하나같이 다 예쁜 푸들 중 나는 우리두리가 눈에 들어왔다. '너와 내가 함께할 운명인가 보다' 생각하고 두 손으로 작은 두리를 소중히 포개어 내품에 꼬옥 안고 그 집을 나왔다. 


1월에 태어난 두리는 이제막 눈을 뜬 어린 강아지 푸들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는 두리의 매력에 빠져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몸 크기가 하루하루 커지더니 1년 안에 두리는 성견의 몸을 가졌다. 강아지들의 평균 수명이 대체로 15~20년 이다보니 강아지 나이 1살은 사람나이 10살과도 같다고 보면 된다. 


어느새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버린 두리는 언제나 항상 우리가족과 함께였다. 가족들이 들어올때마다 팔딱팔딱 뛰며 반갑다고 인상하고 누구하나 들어오지 않으면 자다가도 나와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집에서 밥을 먹을땐 항상 식탁의 음식을 탐하지 않게끔 훈련시켰다. 그리고 가족들의 식사가 끝나고 나면 엄마가 사료에 맛있는 생선이나 고기를 섞어서 특식을 주곤했다. 엄마의 가위질 소리에 두리는 신이나서 빙글빙글 돌며 그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손주세요' 하는 기본동작도 곧 잘했다. 오른 손, 왼 손, 엎드리기 까지 무난히 어렵지 않게 해냈다. 그렇게 참 똑똑한 강아지 두리인 줄 알았다. 우리 가족은 두리의 중성화수술을 시키지 않았다. 그 수술이 강아지에게 오히려 건강상으로 더 이로울 것이라는 여러가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수술을 하든 안하든 장단점은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족은 몸에 칼을 대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컷인 두리는 정기적으로 발정을 했고 집안 곳곳에 소변을 보기도 했다. 두리 전용 화장실이 있는데도 두리는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집안 곳곳에 소변을 누고 찜을 하곤 했다. 두리를 키우는 동안 가장 스트레스였다. 


1살, 2살 시절 나는 두리에게 '찜'하는 행위를 멈추게 하려고 매우 가혹하게 혼을 낸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미안하다. 두 다리로 서서 오래버티는 벌을 받게 했고 그 외에도 세탁바구니를 거꾸로 뒤집어 씌운다음 감옥이라고 하면서 못나오게했다. 그 외에도 엄마의 혀를 차는 못된 행동도 많이 했다. 소변 찜에 대한 나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름 두리도 자신에게 관심이 덜한 가족들에게 보내는 반항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가 더 있었다. 낯선 사람이 오면 미친듯이 짖어대는 두리였다. 낯선사람이 갈 때까지 짖었다. 집에 손님을 데리고 오는게 매우 큰 도전이 될 만큼 두리는 가족들에게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두리를 사랑했다. 저 두가지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여러가지를 시도해봤지만 전문가가 아닌터라 끝내 해결하진 못했다. 결국 두리는 나이가 들면서 저 행동들을 멈췄다. 


2017년 쯤엔가 어느날은 엄마와 화상통화를 하다 두리를 불렀는데 두리가 통 아는척을 안하는게 이상했다. 엄마는 "두리가 귀가 먼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애기를 꺼냈다. 나는 당시 커피숍에서 아이들과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는 괜찮다며 애기했지만 엄마도 속상한건 마찬가지였다. 


사는 내내 두리는 딱 한번 감기에 걸렸다. 그날은 난리를 치면서 뛰어다녀야 할 두리가 가만히 서서 불러도 대답도 없고 건드려도 미동도 없었다. 우연히 아빠가 두리의 그런상태를 발견했고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했다. 다행히 감기였고 건강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 이후로 두리는 다행히 아픈 곳 없이 잘 지냈다.


함께 여행도 다니며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잘 알았다. 특히 엄마와 나, 두리, 이렇게 잘 다녔다. 가족들의 감정변화를 너무나도 잘 알았고 상황에 따라 두리는 우리를 위로하고 사랑해주었다. 그러다 2012년 나는 서울로 올라가면서 두리와의 동거를 끝냈다. 두리는 남은 세월의 대부분을 엄마와 함께 보냈다. 사는게 바빴고 심지어 거리가 먼곳에 떨어져 있던 나는 가족들의 동향을 잘 살피지 못했다. 그저 나에게 닥친 현실에 쌓인 숙제들을 해결하니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족들은 나이가 먹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개가 되어있었다. 2018년 11월 해외살이를 하기 전 2개월 가량 친정에서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많이 달라져 있는 풍경들 그리고 특히 우리부모님과 두리는 매우 늙어있었다. 


푸들은 길고 가는 다리가 매력인데 폴딱폴딱 뛰는 걸 좋아해서 나이가 들수록 관절이 좋지 않았다. 두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쉽게 뛰어오를 수 있었던 침대와 소파에 전혀 스스로 오르지 못했고 내려가는 것도 힘들어했다. 산책을 하다가도 얼마지나지 않아 힘들어서 자주 쉬어갔다. 먹는 사료의 양도 현저히 줄었고 딱딱한 개껌도 먹지 못했다. 예전에는 곰국 끓이고 맛있게 익은 뼈다귀를 주면 환장을 하고 빠드득빠드득 거리며 먹던 우리 두리가 이제는 별거 아닌 개껌도 씹지 못했다.


16살의 두리는 많이 지쳐있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여전히 엄마와 아빠를 지키며 제 할 일을,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해외 갔다와서도 우리 꼭 만나자'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야되' '20살까지 살아야되~'라며 두리에게 주문이라도 거는 것처럼 매일 이야기했다. 

2018년 16살 건강한 우리 두리 모습


예상보다 빨리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 가족은 6개월 가량 또 친정살이를 하게됐다. 만만한게 친정.....2020년 6월 17살의 두리는 아팠다. 동물병원에 갔지만 노견이다보니 수술을 권하지 않았다. 검사를 해도 무의미하다는 말뿐이었다. '양심적으로 애기하자면 강아지가 먹고싶은거 먹으면서 편하게 지내다가 보내주는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라는 의사의 말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동물병원에서 엄마와 나는 티격태격거리며 서로 눈물을 쏟아냈다.


두리가 아파서 거동이 불편해지는 상황이 오지 않길 간절히 바랬다. 놀고 먹고 자다가 편하게 가길 바랬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제대로 서있기는 커녕 자꾸 왼쪽으로 돌려고 하는 두리는 너무 고통스럽게 남은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밥도 스스로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했다. 대변을 누고 온몸에 그 대변이 묻어도 모르고 발버둥을 쳤다. 기저귀를 찬 두리는 매일 아침 새벽 엄마와 함께 회사로 출근했고 사무실에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았다. 퇴근후에도 엄마는 두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그나마 우리가 오면서 퇴근 후에는 내가 집에서 두리를 보곤 했다. 


아파서 걸을 수 없는 두리를 엄마는 재활이랍시고 산책할때 데리고 나가 걷기를 시켰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강아지 아프냐"고 이상하게 쳐다봐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리를 도왔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 지 두리도 힘을 내서 열심히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지나 두리는 점점 씹는 것도 삼키는 것도 힘들어졌다. 엄마는 사료를 갈아서 주사기로 직접 두리에게 먹였다. 다행히 꿀꺽 삼키는 두리가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아픈지 10개월이 됐다. '두리가 요즘 밥도 잘안먹고 힘도 없이 늘어진다'는 걱정스런 엄마의 말에 겁이 났다. 


어느날 '잘 보살펴주진 못하지만 우리곁에 있어달라'고 매일 애기했지만 그날은 그럴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하는 두리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고 심장박동 소리도 너무 희미하게 들렸다. 늦은 밤이 되었는데 잠을 자지 않았다. 새벽에도 눈을 뜨고 있었고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날 밤 나는 "두리야, 그동안 고마웠어 이제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눈감아.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우리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해주었다.


두리는 다음날 엄마 품에서 눈을 감았다. (강아지는 죽을때 눈을 감지 않는다)


뛰지 않는 심장이 너무 낯설었고 점점 굳어가는 두리의 몸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함께 숨쉬고 뛰어놀고 애기하고 위로하고 사랑했던 내 동생 두리.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고 온통 미안한 생각뿐이다. 


모든 생명이 죽을 거란 것을 알곤 있지만 우리들에게 좀 더 시간을 주었으면 그리고 조금만 더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욕심. 17년이란 세월을 살았지만 좀 더 우리와 함께 살기를 바랐던 게 욕심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떠나보내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우리두리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족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었고 때론 화 나게도 했지만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두리야, 넌 우리에게 온 선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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