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섯째 날 - 할슈타트에서 빈
오베르트라운 - 할슈타트 - 케른트너거리 - 프라터놀이공원
정신없이 잠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창밖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커튼 사이로 빼꼼 약간의 안개와 알프스 산맥이 보인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아침 일찍 출발해 체코 체스키크롬로프를 들렀다가 빈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엄마의 체력을 고려해 이동을 최소화하는 계획을 짜기는 개뿔, 보태보태병이 제대로 온 일정이다). 그렇지만 예상과 다르게 엄마가 아닌 내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고 일찍 떠나버리기에는 이곳이 너무 아름다웠다.
깔끔하게 체코 체스키크롬로프를 포기하고 오베르트라운을 좀 더 느끼기로 한다. 그리고 남는 오후 시간엔 할슈타트도 한번 더 방문해 보기로 했다.
오베르트라운은 그야말로 산속 작은 마을인데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평화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그 당시 나는 업무로 인해 굉장히 속이 시끄러운 시기였는데(남의 골치 아픈 일을 대신 해결해 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 여긴 내가 사는 그곳과 다른 세상 같았다. 이곳에선 어떤 다툼도 없을 것만 같다.
사람도 많이 없었다. 산책하는 동안 외국인 2-3 가족 정도를 마주친 게 다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할아버지 할머니 커플은 호수에서 수영을 했다.
엄마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꽃반지를 만들었다. 정확히는 엄마가, 어렸을 적에 많이 만드셨다며 토끼풀 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주셨다. 꽃반지라니. 그때의 엄마는 거짓말 조금 보태 10대 소녀 같았다. 나는 처음 보는 엄마의 얼굴이었던 것 같다. 늘 지쳐 보여 어린 딸의 마음을 졸이게 하던 엄마였다. 늘 미간에 인상을 쓴 채로 하루를 견디는 것 같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진심으로 즐거워하신다. 나에게는 이 여행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한가롭게 오전시간을 보내고 할슈타트로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어제 주차했던 P1 구역을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P2 주차장을 찾아야 했는데 구글 맵에는 주차장 표기가 안되어 이정표에만 의존해야 했다. 영어도 서투르고 내부의 길은 자꾸 일방통행이거나 진입금지여서 뱅뱅 돌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우리는 그만 악마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으니...
바로 할슈타트 옆쪽 학교로 보이는 건물 앞 비어있는 주차장에 그냥 주차해 버린 것. 관리하는 분도 없고 돈을 지불할만한 시스템도 없어 보여서 어쩌면 주차해도 되지 않을까 하며 해버렸다(이미 렌트카로 보이는 차량이 여러 대 서있기도 했다는 변명을 추가해 본다).
이곳에서의 주차에 대한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관광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차량 앞쪽에 편지?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내용인즉 "여긴 사유지야, 차 주차하면 안 되는데 주차했으니 벌금 ㅇㅇ유로를 아래 계좌로 입금하렴."이었다. 우리 차 말고 옆에 서있던 다른 차들도 어김없이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우리는 할슈타트 분위기 좋은 호숫가 레스토랑에서 또 스테이크를 먹고, 보트도 탔다. 분명 조금 전까지 바다 같은 호수에서 사방으로 뻗은 알프스 산맥을 감상하며 한가롭게 신선놀음 중이었는데 현실은 냉혹한 주차 딱지로 돌아왔다.
많이 당황하긴 했지만 주차 위반으로 경찰에 잡혀가진 않을 테니 일단 빈으로 이동해서 내일 해결하기로 하고, 무거운 마음을 이고 진 채 먼 길에 올랐다. 할슈타트에서 빈까지 엄마가 운전하는 렌트카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다. 거리는 3시간 30분쯤 걸리는 거리이니 결코 가깝다고는 할 수 없겠다.
고속도로를 타기 전까지 만난 잘츠캄머구트의 모든 지역이 아름다웠기에 틈틈이 내려 사진 찍고 감상도 하면서 이동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한참 달리고 있는데 날씨 요괴인 나의 영향인지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그때까지는 살면서 만나본 적이 없는 엄청난 폭우였다(이후 2022년 장마철에 서울에서 유사한 폭우를 한번 더 만났다). 와이퍼가 열심히 창문을 닦는데도 앞이 하나도 안보였다. 물론 뒤도 안보였고 옆도 안보였다. 빗속에 갇힌 것 같았다. 우리 앞에 옆에 뒤에 차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불가했고 우리가 차선은 잘 맞춰서 가고 있는 건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속도도 줄일 수 없다. 뒤차도 우리 차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계속 앞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엄마도 나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엄마는 핸들을, 나는 손잡이를 꽉 붙든 채로 20여분을 빗속을 달렸나 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뚝 그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살았다."를 외친 우리 모녀.
변덕쟁이 날씨는 또 쨍하니 하늘을 보여주더니 거기에 무지개를 띄워주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 무지개가 어찌나 반갑던지. 성경에서 저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물로 벌하지 않겠다는 징표라고 했었지. 주차 위반 한번 했다고 하늘나라 가는 줄 알았다.
저녁 6시가 넘어서야 빈 시내 케른트너 거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렌트카 사무실은 저녁 6시까지만 운영되어 이미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럼 무인 반납을 해야 하는데, 나는 무인 반납 방법에 대해 상세히 확인한 바가 없었다. 불 꺼진 사무실을 보며 내가 멘붕하고 있는 사이 엄마는 차를 어디에 주정차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급기야 인도로 올라오려고 했다. 내가 안된다는 제스처를 하자 당황한 엄마는 트램이 다니는 길 위에 차를 올려 버리셨고 나는 육성으로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곧바로 도로로 나가서 아무 일도 없긴 했지만 정말 심장이 쫄깃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주정차에는 실패했으므로 도로를 한 바퀴 돌면서 폭풍검색을 시전 했더니 렌트카 차량을 대여하는 주차장에다가 차를 세워놓고 주차장 표와 키를 함께 반납함에 넣어놓으면 된다고 했다.
그 지점에서 차를 인수한 게 아니라서 주차장이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사무실이 있는 빌딩의 주차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주차하고, 혹시 주차장 내부 중에서도 렌트카를 세워야 하는 칸이 따로 있을까 봐 샅샅이 둘러보고 (없는 걸 확인한 후) 무인 반납함에 키와 주차증을 넣고 나왔다. 할슈타트의 주차 딱지와 마찬가지로 지금 렌트카가 잘 반납된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또한 최악의 경우 돈으로 해결 가능할 거라고 자기 세뇌를 하며 오늘은 우선 후퇴다.
살았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이쯤 고생한 날이면 그냥 호텔로 들어가서 쉴 법도 한데, 우리는 짐을 풀고 또 나왔다. 내가 프라터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빈에 있는 놀이공원인데 시설이 크진 않아도 다른 나라 놀이공원을 한 번쯤 가보고 싶었고 저녁에는 야경이 꽤 예뻐 보였다. 놀이공원은 빈의 다른 구역들 보다는 외진 곳에 있었는데 오스트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불한당 같은 놈들과 마주쳤다. 계속 우리를 불렀는데 못 본 척하고 앞만 보고 지나가니 쫓아오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생각보단 훨씬 평범한 놀이공원이었고 엄마의 워스트 넘버 원의 불명예를 안은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