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편 조선 (3) #10

조선과 그 주변 (4/5)

by 잡동산이

진-한은 3편에서 다루게 될 것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조선-상 역-계-경의 일입니다. 따라 움직였던 낙랑 사람들이 진-국에 함께 머무르게 되어 사람들이 늘어나자 서로 다른 곳에 나누어 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진-한 6개 촌들으로 이어졌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들 진-한에 뒤에 세워지는 신라 사람들이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들 가운데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신라 건국에 가까운 시기의 것들 만을 간추려 적었니다.


그리하서 남겨진[遺] 일들[事]을 적은 자료는 다시 삼국유사를 적을 때까지 전하여졌습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단-군의 시기에 대한 구절에 그리하였듯이 믿을 수 없다고 여기고 그 일들을 적지 않았는데, 만 주석에 그리한 까닭을 변명처럼 적으며 예로 든 구절 통해 그 내용이 다행히 약간이나마 남겼습니다.




삼국유사 주석은 옛 책[古本]이 이르기를 건무 01년이라고 한 것, 건원 03년이라고 한 것이 모두 잘못이다[J:①-④]라고 적었습니다. 이 주석은 그 앞, 前漢地節元年壬子라는 삼국유사 기이편의 구절에 대한 것으로 그 뒤에 적은, 6개 부들의 우두머리가 모여 신라를 세우기로 하였던 일의 시기를 알린 것이니, 옛 책이 적은 그런 일들을 시기가 잘못되어 적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J 삼국유사 기이편 주석: <① 옛 책이 ● 이르기를 "② 건호(= 건무) 01년"이라고 한 것, ● 또한 이르기를 "③ 건원 03년"이라고 한 것 등은 ● 모두 ④ 잘못이다.> <①古本●云②建虎元年●又云③建元三年等●皆④誤>


건무 01년은 MC+25/01[+12), 건원 03년은 MC-138/10[+12)에 해당합니다. 앞의 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신라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뒤의 시기를 살펴보면 위만이 준을 패배시키고 왕 노릇을 하기 시작한 시기, MC-194부터 MC-191 사이보다 2세대 60해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달리 곧 우거가 다스리던 시기에 해당합니다.


앞서 여러 자료로 살폈듯이 뒤에 6개 촌들을 이룬 무리의 일들 가운데 조선-왕 우거와 관련된 일은 조선-상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떠났던 일 뿐이니, 곧 그리하여 남쪽으로 왔다가 진-국 가까이 자리잡은 시기가 바로 MC-138/10[+12)입니다. 아쉽게도 자세한 내용을 적지 않아 전하지 않지만, 이것 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적지 않습니다.




요컨대, 우거가 그 할아버지 위만이 다스리던 땅을 이어 다스리기 시작하였을 시점 - MC-194에서 60해가 지난 MC-134보다 조금 앞선 MC-138 - 에 우거가 다스리고 있던 사람들이 떠난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서 2가지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뒤 조선-한 전쟁이 일어나 진행되던 MC-107에 우거가 여전히 왕 노릇을 하며 싸움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볼 때, 30세보다 적은 어린 나이에 우거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안정되지 않았을 때 다스리던 사람들이 떠난 일로 말미암아 우거의 다스림을 받던 다른 무리 또한 흔들렸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가운데 뒤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우거는 그러한 무리들이 다시 안정되도록 하는 데에 여러 해를 들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새로 1개 무리가 요동-군보다 동쪽 땅에서 모습을 드러내었고 또다른 1개 무리는 요동-군 동쪽 땅에서 우거가 가지는 영향력을 벗어나 모습을 보였습니다.


첫번째 무리는 스스로 이름하기를 부여夫餘라고 하였는데, 부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남아있던 단-군이라는 호 - 이 호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MC-76전에 이르러서입니다. - 를 쓰는 사람, 이름을 달리 비류沸流로 바꾼 발發 등 여러 무리의 일이 이어지기에, 진-한의 일을 다루는 3편에 이어 4편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이 글에서 이야기할 것은 두번째 무리입니다.




이 두번째 무리는 앞서부터 쓰던 예[濊/穢]라는 이름으로 자료에서 모습을 보입니다. 본래 준을 따랐지만 이어 요동-군의 군사들을 등에 업고 침범한 위만을 따랐다가, 위만과 요동-군의 사이가 달라지고 다시 우거가 자리에 오르고서 사람들이 진-번과 조선에서 떠난 뒤로는 떠난 사람들과 같이 그 다스림을 벗어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던 이 무리에게 새로 길을 열어 이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사기 평준서는 오가 돈을 대어 조선을 없애니[K:①-] 무-제가 창해-군을 두었다[K:③]고 적었고, 한서 식화지는 팽오가 예, 맥, 조선을 뚫어내니[L:①-②] 무제가 창해-군을 두었다[L:③]고 적었습니다.

K사기 평준서: ① 팽오彭吳가 ② 사서[賈](= 돈을 대어) 조선朝鮮을 없애니[滅], ● (무-제가) ③ 창해-군[滄海之-郡]을 두었다. ● 곧 ④ 연燕, 제齊 사이가 ⑤ 흩어지고 ● 이어 ⑥ (흩어진 사람들이) 일어나 움직였다. ①彭吳②賈滅朝鮮②置滄海之郡●則④燕齊之閒⑤靡●然⑥發動
L 한서 식화지: ① 팽오彭吳가 ② 예穢, 맥貊, 조선朝鮮을(= 예, 맥, 조선 사이를) 뚫어내니 ● (무-제가) ③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다. ③ ● 곧 ④ 연燕, 제齊 사이가 ⑤ 흩어지고 ● 이어 ⑥ (흩어진 사람들이) 일어나 움직였다. ①彭吳②穿穢貊朝鮮●③置滄海郡●則④燕齊之間⑤靡●然⑥發動


사기 평준서의 조선을 없앴다[滅]는 구절은 앞서 진秦이 조선을 없앴다는 구절과 같이 다스리는 곳을 줄이도록 하였음을 적은 것입니다. 일을 한서 식화지는 예, 맥과 조선의 사이를 뚫어내었다 곧 예, 맥이 조선을 대신하여 한을 따르도록 하였다고 달리었습니다.


이어 두 자료 모두, 예, 맥이 있던 곳에 창해-군을 두었다[K:③ = L:③]고 적었니다. 그러나 시기와 내용은 한서 무제기와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이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한서 무제기 원삭 01년 가을 기사는 동쪽 변방 사람들인 예-군 - 예의 우두머리 - 남려 등 사람들 280,000명이[M:①] 항복하니[M:②] 이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창해-군으로 하였다[M:③]고 적었고,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은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등돌리고[N:①-②] 280,000명을 거느렸는데[N:③] 요동-군에 와서[N:④] 따르니[N:⑤] 무-제가[N:⑥]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도록 하였다[N:⑦]고 적었습니다.


M 한서 무제기: (원삭 01년 가을) ① 동쪽 변방 사람들[東夷]인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 사람들[口] 280,000명[人]이 ② 항복하니 ③ (그들이 있는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하였다. (元朔元年秋)①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②降③爲蒼海郡
N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 원삭 01년 ①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② 우거右渠에게 등돌리고 ③ 280,000명[口]을 거느렸는데, ● (남려 등이) ④ 요동(-군)[遼東]에 나아가 ⑤ 따르니[內屬], ⑥ 무-제[武-帝]가 ⑦ 그(= 그들이 다스리는)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하도록 하였다. 元朔元年①濊君南閭等②畔右渠③率二十八萬口④詣遼東⑤內屬④武帝⑦以其地爲蒼海郡


후한서 동이열전은 한서 무제기의 내용에 몇 가지 구절들을 보태고 고쳐[N:①-②, ④, ⑥] 내용을 쉽게 이해하도록 달리 적었습니다. 다행히 여기서는 크게 내용을 바꾸지 않았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내용을 달리 적었을 때에는 그런 경우들이 있으니 읽을 때에 본래 자료에 가까운 한서 본기, 후한서 본기 그리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하나하나 대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하튼, 이 시기 - 원삭 01년에 해당하는 1해인 MC-127/10[+12) 가운데 가을에 해당하는 MC-126/07[+3) - 에 일어난 예-군의 움직임은 결국 앞서 조선을 떠난 사람들에 이어 우거 다스림을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연과 진秦이 두었고 한이 이어받은 요동-군 바깥에 나타난 이 군의 이름을 창해滄海라고 한 것은, 예[濊/穢]가 현재의 한반도 동쪽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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