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이 세 번이나 취소를 당했다. 밖에는 눈이 왔고 주문이 평소보다 몇 배는 밀린 모양이다. 늦게까지 야근을 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밥이 없어 가야겠다. 그래도 벌써 8시다.
기존에 만들어둔 브랜드 영상에 카피가 필요하단다. 원래 내가 잡던 일이 아닌데 어쩐 일로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 싶지만 꼭 알 필요는 없다. 필기해 둔 자료를 보며 목요일 받은 브리핑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복기해본다. 일단은 어떤 프로젝트든, 해야 하는 목적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목적은 방향이고, 최종적으로 도착해야 할 모두의 꿈이다.
오직 이미지로만 설득하고자 만든 영상이 다른 용도에 보내지게 되면서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카피와 영상이 만나는 지점이다. 직관적이게, 하지만 촌스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방향성은 있지만 방법론은 무한하다. 쉽게 말해 정답이 없다는 얘기다. 아, 원래 내가 하는 일이란 게 그렇다. 그러니까, ‘아’로 쓰든 ‘어’로 쓰든 ‘나’로 쓰든 ‘너’로 쓰든 그건 내 맘인데 어쨌거나 정답 없는 문제의 답은 정답에 가까워야 한다는 게 한치의 여유도 주지 않는 이 업의 패러독스다.
이틀 전 주말 새벽까지 잠을 버틴 형벌로 뇌는 오늘 하루 종일 파업이었다. 연거푸 커피를 서너 잔 마셨는데도 몸은 생존에 가장 필요한 부분만이 깨어 최소한으로 일을 하는 듯하다. 어쩌다 보니 주변은 퇴근하는데 나는 이제야 정신이 슬슬 든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단어들을 살에 이리저리 꿰어 저 멀리 희미한 표적을 향해 던져본다. 하얀 페이퍼 위에 쏘아댔던 살의 흔적이 남는다. 다행이다.
시계를 보니 8시다. 아직 해야 할 게 좀 더 남았는데 생명 같은 저녁 배달은 연거푸 거절이다. 이럴 땐 집에 가야지 별 수 있겠나. 옷을 입고 신을 신고 가방을 챙긴다. 아, 그래도 원격을 켜놓는 일은 잊지 않는다. Hoxy 몰라 집에서 진정한 야근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 그렇게 오늘을 보낸다. 그렇게 내일로 간다.
202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