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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Apr 19. 2022

초라한 어떤 날

한남동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약속이 취소됐다. 무려 지난주부터 잡혀있던 약속이었는데. 동갑내기 셋이 분위기 좋은 바에서 직장의 고단함을 안주삼아 술 한 잔 하려던 부푼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셋 중 하나는 어쩐지 파투 낼 것 같다는 시나리오가 예상에 있긴 했지만, 아침에 A의 어둔 안색을 보고 왠지 그럴 가능성이 매우 짙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당일 취소의 현실화는 좀 너무한거 아닌가. 내내 속으로 구시렁대면서도 카톡 메시지엔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엔터를 누른다.


오늘은 해도 어제보다 많이 길어지고 날은 포근한데 지난주보다 몇십 층 가벼워진 업무는 아무리 늘려도 맥없이 끝나버린다. 오늘따라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 연락할 지인 후보를 다섯 명쯤 생각했다가 차례차례 지운다. 아마도 다들 약속, 혹은 일로 바쁜 중일 것이다. 나의 한가로움을 들키는 것이 오늘은 무척이나 부끄러우니까. 한남동 육교 위에 서서 남산을 등지고 한강 방향으로 멍하니 서있다가 옆팀 상사의 지금 뭐하고 계시냐는 알은체를 당해버린다. 젠장. 세상 모든 시선이 내 뒤로 꽂히는 것 같다. 등 뒤가 무척 시리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어 발길 닿는 데로 걸어본다. 오늘은 집으로 그냥 가면 분명 패배한 기분이 들 테다. 살면서 기분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더 내 기분을 예우해주겠다. 그런데 왜인지 그토록 좋아하던 한남동도, 어둠이 내리는 카페거리의 골목도 미워지려고 한다. 지나가며 보이는 건 죄다 연인들. 다들 어디서 그렇게 부지런히 제 짝을 만났나. 커플 지옥 솔로 만세의 반 인류애적 슬로건을 속으로 외치다 보니 (구) 썸남 생각이 되려 간절해진다. 인연의 끝이 조금 더 멀었더라면. 그 사람의 수다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 이토록 혼자인 기분은 아니었을 텐데. 하긴 사람이 내일일을 안다면 오늘의 내가 이모양 이꼴일 리 없지 않은가. 기분은 어째 더 수렁으로 홀인원이다.


그 카페에 갈까. 가서 책을 읽을까. 아니야 거긴 너무 많이 갔어. 새로운 카페를 찾아볼까. 그러기엔 이미 점심에도 다녀왔어. 1일 2카페는 신선함이 덜하잖아. 그럼 뭘해야 하나. 지나가는 와인바 창가에 앉은 남녀 손님은 아마도 소개팅 중인가 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애쓰는 분위기. 가만있자. 내 마지막 소개팅이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오늘따라 한남동은 왜 이리 날 슬프게 하나.


한참을 더 구시렁대며 익숙한 골목 사이를 걷다 처음 보는 간판 하나를 발견한다. 어라?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자세히 보니 작은 입간판도 놓여있다. 칵테일. 익숙하고 좋아하는 세 글자가 보인다. 그런데 구석에 숨은 낯선 칵테일바엔 흔한 유리창 하나 없이 하얀 벽과 도어만 성문처럼 서있다. 오픈을 한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용기를 내어 손잡이를 잡아본다. 열린다. Oh! 안에는 불이 켜져 있고 낮은 음악이 흐르고 있다. 좋은 냄새와 좋은 분위기. 손님은 아직 나 하나뿐. 여기, 칵테일 파는 곳 맞아요? 네, 맞아요.


찾았다. 오늘, 초라한 나의 시간이 누일 곳을.


202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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