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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10. 2021

반갑다? 첫눈아.

2021년 현재.

예준이는 12살.

종혁이는 10살이다.


"얘들아, 오늘이 입동(立冬)이래."

"입동이 뭔데요?"

"겨울이 시작된다는 거야."

"그럼 가을은 어떻게 해?"

"이제 떠날 준비를 하겠지."

주말에 아이들과 나눈 대화다.


이틀 동안 비가 내리면서 가을은 정말 떠날 준비를 했다.

거리에 낙엽이 가득했고, 아직 나무에 매달린 단풍잎들은 더욱 짙어졌다.


그런데 어제.

"엄마, 내일 첫눈 온대."

종혁이가 태권도 학원을 다녀와서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듯 말했다.

"정말? 누구 그래?"

"어떤 누나가."

"그러게. 빨리 눈이 왔으면 좋겠네."

아이들이 눈이 빨리 내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한 얘기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엄마, 내 엄지손톱에 아직 봉숭아 물이 남아있지~

내일 첫눈이 오면 내 첫사랑이 이루어지겠지?"

종혁이는 엄지손톱을 내보였다.


여름방학에 할머니 댁에서 2주일을 보내면서 막내 고모가 종혁이 손가락에 봉숭아 물을 드려주셨었다.

붉게 물든 작은 손톱을 첫눈 올 때까지 지키겠다고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위생상 손톱이 길어지는 걸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때가 되면 깎아주었다.

결국 엄지손톱 끝에 아주 조금 봉숭아 물이 간신히 달려 있는 정도다.

그 봉숭아 물이 엄지손톱 끝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건, 학교에서 배우는 칼림바 덕분이었다.

손톱이 짧으면 칼림바를 연주하기 힘드니 조금 길게 잘라달라고 사정했었다.



일찍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베게 옆에 둔 핸드폰 진동소리에 깼는데 7시 20분이었다. 남편이었다.

"여보, 눈 와요."

나는 이불을 제치고 거실 창가로 갔다. 정말 눈이 왔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정말 눈이었다.

남편과 전화를 끊고 아들들을 깨웠다.

"얘들아, 정말 눈 와."

종혁이는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단박에 들어 올리고 일어났다.

거실 창가로 달려가 두 손을 펴 양 눈 옆에 붙이고 유리 문에 바짝 다가갔다.

"우와, 정말 눈이네. 그 누나 정말 족집게네. 오늘 눈 온다고 하더니 정말 오네."

눈발은 곧 굵어졌고, 아들들과 난 창문 앞에 한참 서있었다.

11월이 시작된 지 열흘밖에 안됐는데, 눈이라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때 예준이가 한마디 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너무 좋아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제 11월인데, 눈이 와?

지구의 기후변화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얘기겠지.

며칠 전 신문에서 중국 북경에 첫눈이 내려 단풍잎을 덮쳤다는 기사도 봤잖아.

중국 얘기인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도 이러니, 걱정인 거지.

그렇게 좋아만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창밖을 보며 방실거리는 종혁이와 나를 두고 혼자 뒤돌아 가버렸다.

역시 낭만 제로 예준스러운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환경오염으로 기후 변화가 예전 같지 않음을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예준이 말대로 걱정은 걱정이다.


"엄마, 진짜 첫사랑이 이루어질까?"

종혁이는 형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펑펑 내리는 눈이 반갑고,

아직 엄지손톱 끄트머리에 매달린 봉숭아 물에 설레했다.

이 아인 정말 낭만 덩어리다.


어쨌든,

첫눈아. 반갑다.

어서 와 겨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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