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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Apr 12. 2021

진지해도 괜찮아

<매일매일 채소롭게> 완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완두 잼을 만들기로 했다. 완두의 매력은 수수하게 진한 단맛을 낸다는 거다. 과일잼의 화려한 맛과는 다른 진득한 맛이다.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은 잘 못해도 언제나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스타일 같달까. 이왕이면 묵묵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도 잘하면 좋겠지만, 둘 중에 하나만 가능한 완두 같은 사람에게는 괜히 마음이 간다.

어릴 때부터 나는 진지한 게 콤플렉스였다. 유쾌하고 재밌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한때는 그들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런데 서른 살부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는 칙칙한 현실에서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지낼 수 있는 건 내가 진지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감동적인 책 한 권, 향기 좋은 차 한 잔, 볕이 좋은 날의 요가 수업. 나는 별것 없는 일상에서 쉽게 빛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쉽게 빠져들고 몰입하는 성격 탓에 예민하고 진지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의 그런 점이 오히려 좋아졌다.

이십대까지는 누군가와 부대끼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사회 초년생일 때는 회사 동기, 선후배와 늘 함께였다. 회사 생활이 익숙해지고, 주변 사람들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주 52시간이 도입되고, 회식이 없어졌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람들과 거리가 생겼다. 늘 누군가와 함께 일하지만 예전보다 사람에게 영향을 덜 받게 되었다. 이십 대에는 나의 진지함을 ‘남 생각’ 하는 데 썼다. 삼십 대가 되고 비로소 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기분이 좋은지, 화가 나는지. 어떤 성향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서른 살 내내 매일매일 치열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니 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나를 완벽하게 아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를 안다는 생각은 안정감을 준다. 기분이 상할 때, 불쾌한 감정이 들 때, 정확히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알게 되면 마음을 다스리기가 좀 더 쉬워진다. 기분이 좋을 때에도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생각하고 기록해 둔다. 그리고 자주 그 상황에 놓일 수 있도록 만든다. 기분 좋은 일은 좀 더 자주 일어나도록, 기분 나쁜 일은 줄어들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마음을 비우고 흘려보내는 연습을 한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지만, 어느 정도 연습하고 나니 일상이 전보다 수월해졌다.

무엇이든 애매한 것보다 확실한 게 낫다. 유쾌하지도 진지하지도 못한 채로 우왕좌왕할 바에야 차라리 확실하게 진지해져 보자는 선택이 내 일상에 즐거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 4월 5일 식목일에 출간된 저의 첫 책, 채소 에세이 <매일매일 채소롭게>의 일부입니다.

책의 내용  10 꼭지를 골라 조금씩 소개하려 합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9028342?OzSran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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