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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n 08. 2022

나는 내 삶을 선택한 걸까?

책 <숲 속의 자본주의자를 읽고>



삶을 이루는 것 중 내가 선택한 것은 얼마나 될까? 지금 다니는 회사, 함께 사는 남편, 소유하고 있는 물건, 자주 연락하는 친구, 퇴근하고 벌이는 사이드 프로젝트까지. 모두 온전히 내 의지로 <선택>했다. 그렇게 보면 지금 내 삶은 내 선택의 결과다. 그러나 내 삶을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이 맞을까?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고, 무엇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사는 걸까?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한 지 딱 두 달이 지났다. 아무도 이곳으로 이직하라고 권유한 적 없었다. 이전 직장은 워라밸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연차를 매년 100% 소진했다. 여름휴가를 합쳐서 1년에 22일의 휴가를 썼다. 직장 동료 대부분이 친절했다. 무엇보다 회사의 위치가 집에서 가까웠다. 이렇게나 매력적인 안락함을 뒤로하고 이직 결정했다. 집에서 1시간 반이 걸리는 회사, 매일 야근을 해야 하는 회사, 연차를 쓰기 어려울 만큼 일이 많은 회사, 종종 새벽과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얻고 싶은 것을 위해 힘듦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선택이었다. 새로운 산업에서 젊고 도전적인 동료들과 일하고 싶었다. 그 덕분(?)에 몸은 피곤하지만 성장 욕구를 충분히 충족하며 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대체 언제까지 회사를 다녀야 할까... 하는 답답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러 회사 중 어느 회사를 갈지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회사를 벗어나는 선택지는 내게 없다고 느꼈다. 




회사 밖에서 이만한 돈을 주는 데가 있을까? 오히려 회사 밖을 벗어나면 노동 강도는 더 세지고 소득은 더 줄어드는 것 아닐까? 가까스로 마련한 작지만 소중한 집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벌이가 줄어들면 남편과의 다정하고 끈끈한 관계가 흔들리는 것 아닐까? 이런저런 불안에 압도되어 회사를 벗어난다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했다.


작년에 첫 책을 출간했다. 작가로서 성장하면 회사 밖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1년간 원고 청탁을 받고, 여러 회사들과 개인사업자로 계약을 맺어 일을 하며 깨달았다. 건당 10만 원짜리 일에도 계약서를 몇 시간 동안 꼼꼼히 살펴보고, 조항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실랑이를 벌이고, 노동으로 쳐주지 않는 사전 미팅에 참석하는 일이 과연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더 나은 게 맞을까? 차라리 회사를 다니며 좋아하는 글만 골라 쓰는 것이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해 보였다.




10년 차 회사원이 되어 비로소 스스로를 <회사 인간>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렇게 일 못하겠다고 발버둥 치기를 10년, 결국 <회사 인간>이 되어 버렸다. 밖이 더 위험하다고 여기며 고개만 빼꼼히 젖혀 밖을 보는 회사 인간.




그런 내게 박혜윤 작가가 말했다.




"회사 밖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니다. 회사에 있기로 선택한 것뿐이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뛰어넘을 논리가 없다. 회사 밖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박혜윤 작가는 <직접 살아냄>으로 보여줬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제도, 규칙, 시선을 벗어나라는 흔한 말이 그 앞에서는 뻔하지 않았다. 서문에서 말했듯, 그의 삶은 '인생의 골수를 맛보는 삶'처럼 보였다.




박혜윤 작가는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넉넉한 소득이 아닌 적은 소득과 적은 소비를 선택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더 원하는 삶으로 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가 오히려 되묻는 듯했다.




왜 일정한 월급이 필요한가? 당신이 누리는 것의 '본질'을 파고들면 무엇이 나오는가? 당신이 사고 싶은 것은 서울의 10억짜리 아파트인가 가족과 안락하게 살 집인가?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맥북, 아이패드, 애플 워치, 각종 매거진 구독, 인터넷과 휴대폰, 가방과 옷, 매일 한 잔의 스타벅스 커피가 필요하다고?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소비할 필요가 없던 것 아닌가?




박혜윤 작가는 도서관에서 책과 인터넷, 컴퓨터를 빌린다. 그렇게 빌린 자원으로 글을 써서 돈을 번다. 적은 돈을 벌지만 4명의 식구가 생활하는 데 충분하다. 그의 가족은 한 달에 100만 원을 쓴다. 집에는 인터넷도, 커피도 없다. 유일한 자원은 전기다. 전기로 난방을 하고 몇 가지 가전제품을 사용한다. 블루베리가 열리는 계절에는 온 가족이 들판을 돌아다니며 야생 블루베리를 수확한다. 자연에서 얻은 블루베리를 냉동고에 넣어두고 몇 달 동안 신나게 디저트로 먹는다. 통밀을 사다 직접 갈아서 밀가루를 만들고 빵을 만든다.




이 책을 읽고 있다고 하자 공부 모임 친구들이 하나같이 같은 댓글을 달았다. "이런 삶도 있구나~ 신기해하며 읽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못 살 것 같아요." 나 역시 이 삶이 부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당장 바꿔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회사 인간이 된 것은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린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내 선택임을 깨달았다. 다른 삶은 존재한다. 다른 삶은 언제나 가능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뿐이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지속할 이유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의 이유와 가치.


이 문장을 쓰고 나니 분명해졌다. 내 삶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스스로 부여한 삶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그 힌트는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박혜윤 작가의 삶에서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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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심히 사는 걸까

의미 있게 사는 걸까?




있는 힘껏 달리면서도 그 마음에는 희망이 아니라 체념이 자리 잡는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거야. 어쩔 수 없어.' 이런 이상한 포기 상태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붉은 여왕은 말한다. "이곳에서 어디로 가려면, 최선보다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조금씩 더 빨리 달릴 방법을 찾는다. 잠을 줄여보고, 점심시간을 쪼개고, 출퇴근 시간도 활용한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과 의미 있게 사는 것은 다르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동물적인 생존을 해결한 후에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산 과정에서 부품이 되거나 소모되는 게 아니라, 생산 과정을 놀이로 만들 수 있을까? 돈을 버는 과정이 나를 나답게 하는 창조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답을 찾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이 문장에 그만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는 지금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의미 있게 살고 있는 걸까?


성실보다 효율은 추구하는 시대이지만 열심은 여전히 가치 있는 미덕이다. 그래서 자주 열심히 사는 것과 의미 있게 사는 것을 헷갈린다. 피로에 지쳐하던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회사를 나오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등 떠밀려가듯 하루를 보내면서 타인의 재촉에 재깍재깍 대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상사와 동료의 물음에 빨리 대답해주는 것이 의미 있는 삶과 얼마나 맞닿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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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욕망에 항복하기 위해선 자신의 욕망이 어떤 건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욕망을 줄이는 일이 나에게 불가능한 고행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욕망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를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은 욕망을 마음껏 따르면 타락하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욕망을 극대화시켜 거의 무한대의 묻지 마 소비를 부추기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만의 고유한 욕망과 욕구를 정확하고 정밀하게 아는 것이 오히려 소비의 피곤을 줄여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싸도 갖지 않는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칭송하는 가치라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추구하지 않는다. 넘쳐나는 지식 사이에서 내가 정말 궁금해서, 알면 내게 기쁨을 주는 것만 파고든다. 그렇게 나의 욕망을 소중하게 탐구하다 보면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점점 너그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30대가 되어 좋은 점이 많다. 그중 하나가 내 욕구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0대의 나는 화장품 MD를 꿈꿨다. 매일 아침 한 시간 넘게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곤 했다. 30대가 훌쩍 넘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꾸미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을. 계절과 상황에 맞는 옷을 여러 벌 갖추고 나자 더 이상 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한참 동안 화장을 하던 때의 나는 쉽게 움츠러드는 마음을 자꾸만 옷과 화장으로 가리려 했던 것 같다. 더불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외식하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세련된 인테리어와 맛있는 음식은 언제나 좋다. 하지만 준비와 이동에 시간을 투자할 만큼 원하지는 않는다. 늘 먹던 나물반찬에 슥슥 잡곡밥을 비벼 먹는 게 몸도 위장도 편하고 즐겁다. 입맛에 맞는 간단한 베이킹을 배우고 난 뒤로는 빵이나 디저트도 사 먹지 않게 되었다. 그때그때 집에 있는 재료로 원하는 과자를 만들어 먹는다.




월급이 필요한 이유는 안전한 집과 노후를 준비하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박혜윤 작가처럼 시골에서 적게 쓰고 적게 벌어도 되지 않을까? 계속 질문을 던져보았다. 도대체 왜? 회사가 왜 필요할까? 반복되는 질문 끝에 알았다. 회사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사회문화적 소속감이었다.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려면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사는 도시에서도 비슷한 책을 좋아하는 독서 친구를 찾기가 어려운데 시골에 가면 얼마나 더 어려울까? 도시가 나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편의시설은 도로나 상하수도, 직장이 아니라 문화 인프라였다. 문화 인프라 때문에 도시를 벗어날 수가 없었고, 도시에서 집을 구하려면 10억이 필요했다. 집값 10억에 노후자금 10억을 얹어서 총 20억을 모으려면 남편과 내가 20년은 더 회사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서울을 벗어나도 문화 인프라를 누리며 살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손에 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일부러 그런 환경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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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기가 힘든 진짜 이유




‘돈 벌기가 참 어렵다, 나는 돈 버는 재주가 없다.’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빵을 팔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돈 쓰는 사람의 마음에 맞출 생각이 없었다. 기자로 일할 때, 쓰고 싶은 기사를 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월급은 내가 깊은 생각을 하고, 내가 알고 싶은 것을 기사로 쓰면서 더 성숙한 사람이 되라고 주는 게 아니었다. 오늘 당장 돈을 내고 신문을 사는 사람, 돈을 내고 신문에 광고를 싣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걸 쓰라고 받는 돈이었다. 지극히 투명한 돈거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번다는 것은 어쩌면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가능한 현실이기는 하되 기대하지는 말아야 할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돈을 벌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 대신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에게 선택권이 생긴다. 막연히 ‘돈 벌기 힘들다’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집하는 대가로 돈을 적게 벌거나, 돈을 쓰는 사람에게 맞춰 많이 벌고자 하거나,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내가 결정하는 순간 이미 능동의 세계로 넘어간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회사를 다니며 퇴근 후 프리랜서로 글을 쓴다. 원고 청탁을 받아 원고지 장당 얼마의 고료를 받기도 하고, 글쓰기 공모전에서 수상해서 상금을 받기도 한다. 청탁 원고와 공모전 원고를 쓸 때 느낀 것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하는 것의 힘듦을 체험했다. 회사 밖에서는 하고 싶은 일의 분야는 정할 수 있지만 일하는 방식을 정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회사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정할 수는 없지만 연차와 경력이 쌓일수록 일하는 방식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다. 재택근무와 유연근무제를 시행하는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나에게 맞는 일하는 환경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돈을 번다는 것은 상대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일의 영역이나 일의 방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돈을 줄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 돈 벌기가 힘들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돈 줄 상대에게 내 방식을 고집하겠다는 말이다. 돈벌이의 '힘듦' 또한 어쩌면 내가 <선택>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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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고 싶다




타인이 사라지면서 내가 누구인지, 나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필요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증명해야 할 필요도 전부 사라졌다.

내가 나 스스로를 평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설명한다. 생존을 위해 공기와 물이 필요하듯이, 끊임없이 타인에게 기대어야 한다는 그 사실. 우리는 이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타인이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나의 모자란 점이야말로 나 자체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오는 고통은 나답게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나이가 드는 것이 축복이라고 느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사람들과 부대낄 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단체 생활은 나의 영혼을 파괴한다고 느꼈다. 20년 학교를 다니고, 10년째 회사를 다니며 늘 꿈꿔왔던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타인의 대답을 듣고 싶어 했다. 글을 써서 온 세상에 들어달라고 외치는 이 행위야말로 나의 가장 큰 모순이다. 사람을 피해 나만의 안식처로 피난을 가서 쓴 글을 도로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모순을 박혜윤 작가를 통해 마주했다. 사실 나는 절실하게 타인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타인,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타인, 나를 증명할 타인, 나를 나만큼 알아줄 바로 그 타인을 찾아 헤매고 있다. 나는 내가 되기 위해 언제나 타인이 필요했다. 나다워지기 위해 고립을 향해 달렸으나 고립의 문 앞에서 깨달았다. 혼자서는 나다워질 수가 없다. 타인과 부대끼며 타인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원망할 때 비로소 나는 나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평생 수많은 타인 속에서 "당신은 내가 찾던 타인이 아니야."를 외쳤다. 그리고 혼자만의 동굴로 들어갔다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내가 찾는 타인은 대체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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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결론을

사랑으로 끝맺는다



우리에게 시간이 영원하지 않은데도 마치 영원한 것처럼 멈추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다. 위에서 말한 자신이 무가치한 인생을 살았다고 절망하는 사람이 모모에게 이야기하다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이야기도 역시 사랑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한정된 시간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일지라도, 자신의 특별한 가치를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다. 듣는 것은 어떤 기술이 아니라 사랑이다.

내가 큰아이에게 너그러운 건, 천사 같은 마음이나 지혜를 가져서가 아니다. 나와 너무 다르니,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잊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닮은 존재라고 해도, 그 안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조금 더 현명해진다.

어떤 사람의 인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후회할 만한 인생인지 아닌지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존재니까. 타인은 그래서 소중하다. 나에게 무언가 해줘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게 해주니까. 나 자신을 잊고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그때가 어쩌면 우리가 신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숲 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나와 남편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둘 다 계획적이고, 안정지향적이고, 내형적이다. 나와 남편이 다른 지점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다.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안전한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를 불안으로 느끼고 그 불안을 동력 삼아 나아간다. 남편은 현재에 만족한다. 현재에 집중해서 열심히 살아내면 안전한 미래가 찾아온다고 믿는다. 현재에서 안정과 기쁨을 느끼고 그 행복을 동력 삼아 하루를 누린다.



그런 남편이 너무 부러워서 결혼을 결심했다. 그의 옆에 있으면 늘 나의 불안은 별 것 아닌 게 되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미래를 걱정하는 내 옆에서 남편의 지금을 누리는 자의 유쾌함과 여유를 매 순간 알려줬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덜 불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인생의 중심축은 철저히 나 자신이다. 남편은 자신의 인생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상대의 행복을 지켜보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는 매일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어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자주 나를 잊곤 한다.




요즘은 무엇이든 자꾸만 사랑과 감사로 결론을 맺어버린다. 스스로 지루해져서 삐딱하게 결말을 맺고 싶은데 세상에 부딪힐수록 나의 모남을, 그 모남을 알면서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을, 그들과 내가 만드는 지금 이 순간은, 사랑하고 싶어 진다.


어릴 때는 이상하고 예민한 나를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상함과 예민함을 사랑하고 있었다. 예민함이 사실은 나를 빛나게 하는 섬세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예민함이 나를 지탱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랑해버리는 것,

이것만은 내가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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