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다가 알았다. 넘어져도 무너지지 않는 드라마 주인공이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매일 반복하는 루틴을 가지고 있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희도는 매일 밤마다 일기를 쓴다. 엄마와 싸워서 우울한 날에도, 좋아하는 띠부띠부띠부실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빵을 사 먹은 날에도, 사랑하는 이진과 헤어진 날에도, 경기에서 이기고 진 모든 날, 매일 일기를 쓰며 하루 동안 미처 소화하지 못한 감정과 경험을 끌어안고 또 흘려보냈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수영에게도 루틴이 있다. 퇴근하고 혼자 와인바에 가서 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것. 대화 상대도 없이 혼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한다. 드라마를 보며 작가는 굳이 왜 수영이 와인을 마시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줬을까 궁금했다. 와인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나? 와인이 스토리에 중요한 장치인가?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도 와인으로 어떤 이야기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수영은 와인을 마시고, 낡은 아파트 베란다를 허브 화원으로 가꾸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림을 그린다.
그런 장면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 작가는 알았던 거다. 오늘을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지켜내기 위해 우리에게는 나를 이해하고 감당하기 위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는 <자기만의 방> 시리즈를 만든다. 기록, 인테리어, 차, 빵까지 매번 소재는 다양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일관된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고유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양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은 <공부>였다.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내가 붙들었던 것은 공부였다. 퇴근 후 책상에 가만히 앉아 책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는 현실을 피해 책으로 도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철학과 사회과학 책을 읽으며 낯선 언어가 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도망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해 준 것이었다. 세상에는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다. 매일 회사에서 이것은 폭언인가 성희롱인가 농담인가 경계를 알 수 없는 말을 들으며 내 삶이 이것뿐이라면, 이렇게 진창 같은 모습으로 끝날 거였다면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자책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책 속 활자들은 말했다. 세상에는 다른 삶도 있다고, 삶이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좋은 경험을 가까이하려 하고, 나쁜 경험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생각하는 "잘 사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잘 설계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떤 경험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지 알아차리고 그 경험을 실제로 하게 해 주는 사람이다. 꾸준히 공부하며 공부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경험을 알맞게 설계해 나가는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나에게는 선물 같은 경험이었다.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두 손으로 단단히 쥐었던 등불이었다.
시간이 흘러 여러 번의 이직을 했다. 10년 동안 나도 회사도 변했다. 회사에서 업무로 꽤 인정도 받고, 성과도 낼 줄 알고, 동료들과 신뢰를 주고받는 직장인이 되었다. 스물다섯의 나에게 공부가 암흑 속 지푸라기였다면 서른다섯의 나에게 공부는 온전히 나를 위해 하고 싶은 것, 한발 더 나아가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꾸고 싶은 것이 되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여전히 밤이면 책상에 앉아 책과 노트를 펼친다. 똑같은 자세로 앉아 읽고 쓴다. 그러나 그 매일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10년 전 나는 <지금의 나>와 <바라는 나> 사이의 간극을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아득하게 느꼈다. 내가 바라는 나는 합리적인 회사에서 긍정적인 동료들과 협업을 하고 성과를 내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현실은 정확히 반대였다. 그때 나는 문제가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저 그런 사람이라서 그저 그런 회사에서 그저 그런 사람들과 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무시하고 질책했다. <바라는 나>는 절대 도달할 수 없어 보였다. 회사 안에서는 숨도 못 쉬고 숨어 지내다가 로비를 나서면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회사나 동료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잘못된 목표와 스스로를 향한 시선이 문제였던 거다. 취업 준비생 시절 내 목표는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가 평균 이상의 월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온 것은 "이런 회사에서 이런 사람들과 일하다니 수치스럽다."는 자괴감이었다.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가 평균 이상의 월급을 받는 것"이라는 목표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아마도 선생님이, 친구들이, 부모님이, 신문과 인터넷이 입을 모아 나에게 주입시켰던 것 같다. 의심도 하지 않고, 아니 사실은 의심을 했지만 나조차도 "누구나 알기에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인정"을 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오랫동안 목표로 삼았던 <바라는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당연히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심지어 목표를 이룬다고 해도 그 모습은 내가 바라는 나일 리가 없었다.
문제는 목표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언제나 나를 아쉽고 부족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이었다. 내 마음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완벽주의와 인정욕구는 "지금으로도 충분해"라는 생각을 안일하고 게으른 도태라고 여겼다. 더 잘하고, 더 성과를 내고, 더 많은 숫자를 가져야 비로소 충분해질 거라고 믿었다. "더"는 비교급이다. 비교급이 최상급이 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어. 지금으로도 나는 만족해."라는 기준이 내게는 없었다.
매일 울며 퇴근하던 10년 전 내가 하던 공부는 여전히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면 나아질 거야, 자격증을 따면 나아지려나, 대학원 학위를 얻으면 나아질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반복하며 더 나아지기 위한 공부였다.
10년이 지나 지금 내가 하는 공부는 나의 요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세상에 나를 맞추기 위한 공부에서 세상을 나에게 맞추기 위한 공부로 바뀌었다. 비로소 내 삶에 공부를 초대할 수 있게 되었다.
공부의 주제와 방법을 정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제와 방식을 그려보는 일이다. 타인의 목표가 아닌 온전히 나의 목표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전의 나는 사회의 시선과 완벽주의라는 자극으로부터 왜곡된 대응적 목표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목표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속한 환경을 제약이나 약점으로 인지하지 않고 <나의 맥락>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크리에이터로 활동을 시작할 때는 빠르게 팔로워를 늘리고 싶었고, 더 많은 콘텐츠와 강연 수익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바라는 목표는 그게 아니었다. 팔로워가 아주 천천히 늘고, 수익이 늘어나지 않더라도 내가 가진 고유한 이야기를 꾸준히 쌓아나가는 것, 그것이 진짜 내 목표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목표를 조정했다. 하고 있던 활동을 물리적으로 많이 줄였다. 포기나 후퇴가 아니라 나다워지는 과정, 내 맥락을 존중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목표를 바꾸고 나니 다시 <실천 동력>이 생겼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났다. 3년 내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를 바랐고, 신기할 만큼 매일 실패했고, 다시 다짐하기를 반복했다. 사실 내 몸은 아침보다는 밤에 해상도를 높이는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나의 맥락을 존중하지 않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다 아침형이니까" 나도 그러라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뭐가 어때서?라고 인정하고 나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하던 자책이 줄었다. (여전히 아쉽긴 하다.)
이렇게 <대응적 목표>를 <맥락화>해서 <조정된 목표>로 바꾸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고 지속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성취했다는 인식>이 스스로 생겼다. 나는 바뀌지 않았는데 어느새 <지금의 나>와 <바라는 나> 사이 간극이 좁혀졌다.
이 과정을 꾸준히 기록했다. 기록하기 위해서는 글로 정리하거나, 소리 내어 말하거나, 사진을 찍어 시각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기록을 통해 반복해서 나를 기억하고, 인정하고, 드러내고, 존중하게 된다.
외부 세계에서 일하고, 배우고, 행동하고, 대화하는 모든 과정은 에너지가 바깥으로 향한다. 그 자극을 정리하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분류하고, 내 언어로 다듬는 기록 과정은 에너지가 안으로 향한다. 바깥을 향하는 공부와 내면을 단단하게 다잡는 기록을 동시에 할 때 비로소 에너지의 균형이 맞는다. 1년 넘게 이끌고 있는 공부 리추얼은 원심력과 구심력을 적절히 조절하며 원을 만드는 것과 같다. 단단한 나의 중심을 가운데 두고 각자의 속도로 원을 그리고 있다.
매일 똑같은 원만 그려서 무엇하냐고? 이 원은 계속 변한다. 원심력이 구심력보다 클 때, 그러니까 기록하기 벅찰 만큼 많이 배우고 흡수할 때는 원이 커지고, 새로운 배움을 멈추고 차분하게 정리하는 시기에는 원이 줄어든다. 원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지만 멀리서 오래 지켜보면 원은 결국 빙글빙글 나선형을 띄며 커진다. 그것도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안정적인 형태로 말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넘어져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일 배우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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