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스콘, 무침, 콩포트
더위가 한풀 누그러지면 무화과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화과 과육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뉜다. 겉 부분은 하얀색의 그리 달지 않은 과육, 속은 핑크색의 달콤한 과육이다. 수분감이 많지 않아서 다른 과일보다 든든하다. 잼이나 콩포트로 만들면 무게감이 느껴진다. 수분이 적은 과일은 여러 모로 활용하기가 좋다. 좀 더 바짝 건조한 후 술이나 홍차에 절여서 과자 반죽에 넣어 먹어도 맛있다.
어릴 때, 무화과로 유명한 전라도 무안 근처에 살았다. 겨울철에 감귤 박스에서 손톱이 노오래지도록 귤을 까먹는 것처럼 늦여름엔 무화과를 쉼 없이 까먹었다. 아까운 줄도 모르고, 껍질을 훌렁훌렁 벗겨 속살만 홀랑홀랑 먹었다. 서울로 이사를 오니 무화과는 귀한 과일이 되었다. 예전만큼 무화과를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다. 지금은 그래도 어딜 가나 이맘때 무화과를 볼 수 있지만, 15년 전쯤 서울로 이사를 막 왔던 당시에는 무화과를 동네 마트에서 흔하게 팔지 않았다.
자연의 재료들은 말리거나 구우면 맛이 더 깊어지는데, 무화과도 정말 그렇다. 엄마가 시골 할머니 집에 다녀오시고는 무화과 한 상자를 주고 갔다. 냉장고에 넣어두어도 일주일 이상 보관하기는 힘들다. 여차하면 이 아까운 무화과가 상할까 싶어 콩포트를 만들었다. 콩포트는 잼처럼 과육을 갈지 않고 적당히 숭덩숭덩 썰어서 졸인다. 과육의 모양과 식감이 남아있어서 좋다. 세밀하게 가공된 음식보다는 좀 덜 손질된 상태가 좋다. 이 도시에서 지나치게 정제된 음식을 먹고 있노라면, 자연의 재료를 먹는 것이 아니라 가공의 물질을 먹는 느낌이 든다.
무화과 콩포트는 스콘과 잘 어울린다. 요즘 스콘 굽기에 푹 빠져있다. 생협에서 건조 무화과를 사다가 무화과 스콘을 굽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파는 파인애플로 파인애플 스콘을, 냉동 산딸기로 산딸기 스콘을 만들기도 했다. 어떤 스콘이던 무화과 콩포트는 잘 어울린다. 설탕 대신 소량의 메이플 시럽을 넣어서, 그리 달지 않은 맛도 좋다.
여전히 무화과가 많아서 식사 대신 무화과를 먹기로 했다. 두부를 으깨어 두유, 소금, 깨와 함께 무쳐내었다. 콩국수에 무화과를 넣은 느낌도 나고, 무화과에 소금을 살짝 가미한 것 같기도 하다. 든든하고 짭짤하고 달다.
한 가지 채소 요리
혼자 살다 보니 재료 한 가지가 생기면 며칠이고 그것만 먹어야 하는 고충에 처음에는 괴로웠다. 한 번은 알배추를 동네 슈퍼에서 천 원 주고 샀다. 요리에 대한 감이 없던 때라, 팔뚝만 한 알배추라 한 번에 다 썰어서 큰 냄비 가득 된장국을 끓였다. 며칠을 배추 된장국만 먹다가 물리고 물려서, 반 넘게 버렸다. 그 이후로는 한 개씩 포장된 재료를 사거나 밀 키트를 샀다. 그러다 점점 꾀가 생겼다. 한 가지 재료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 수 없나? 디저트도 만들 수 없나?
도서관에서 채소 레시피 책을 빌리고, 퇴근길 서점을 들러 요리책을 찾아봤다. 레시피 앱이나 블로그도 유용하지만, 오래 고민한 후 마음먹고 정리한 책의 레시피가 좀 더 신뢰가 갔다. 자주 마크로 비오틱 전문가 이양지 선생님의 영상도 참고한다. 한 가지 채소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정말 많고, 요리라고 해서 대단한 양념이나 조리법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이든 메인 재료를 선택하고, 집에 있는 부재료들로 양념을 하면 된다. 굽거나, 삶거나, 찌거나, 튀기거나 한 가지를 선택해서 조리해준다. 간편함을 가장 중시하는 나는 주로 오븐에 굽거나 냄비에 삶는다. 조금씩 내 요리 스타일에 '스타일'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다. 간편하게, 재료의 맛을 살리며, 식어도 맛있는 조리법.
얼그레이 스콘 위에 무화과 콩포트를 올리고 양배추 절임을 얹었다. 요리라고 하기에는 이미 만들어둔 재료들을 조합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이 재료들을 함께 먹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고소하고 단단한 스콘이 조금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 틈에 무화과 콩포트의 단맛이 느껴진다. 너무 달고 퍽퍽한데 싶으니, 이제 양배추 절임의 시원하고 아삭함이 온다.
퇴근길에 아주 작은 손바닥만 한 단호박을 샀다. 초록색 몸통을 가로지르는 연초록빛 줄무늬가 선명해서 데려왔다. 작아도 단단하게 맛있을 것을 알았다. 이 단호박으로 디저트를 만들고 싶긴 한데, 찌고 으깨서 반죽 속에 넣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그 자체로 느끼고 싶었다. 단호박은 그럴 만큼 충분히 부드럽고 달콤하니까.
팥앙금과 두유를 섞어서 단팥죽을 만들었다. 불린 다시마와 함께 푹 끓여주었다. 단짠의 베이스 완성!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찐 단호박을 잘라 넣었다. 이렇게 간단하고 이렇게 맛있을 수가!! 시원하고 아삭한 양배추 절임을 곁들었다. 균형이 잘 맞는 음식은 3가지의 맛과 3가지의 식감을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은 어수선하고, 그 이하는 심심하다. 부드러운 단맛의 단호박, 짭조름하고 찐득한 다시마, 아삭한 양배추.
디저트란 뭘까
식사 전후에 먹는 부드럽고 달콤한 음식?
식사 대용으로 먹는 바삭하고 묵직하게 단 음식?
그렇다면 꼭 가루 재료, 계란, 유지방, 설탕을 한데 뭉쳐서 구워낸 형태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도라지정과도, 쫀득하게 말린 감과 대추도 디저트이다. 그리고 이렇게 채소 그 자체로도 충분히 디저트가 된다. 심지어 디저트도 되고 밥도 된다.
맛있다? 건강하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내 음식에 대한 평가는 '건강하다!'
'맛있다' 보다 먼저 나온 이 '건강하다'라는 말은 '자극적인 감칠맛이 부족하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밋밋하고 거친 요리가 좋다.
나의 요리도 조금씩 무르익어 가는 걸까. 점점 밖에서 사 먹는 음식보다 내가 만드는 요리가 입에 잘 맞는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은 늘, '오늘 저녁은 뭐 해 먹지'라는 생각으로 분주하다. 오늘도 무슨 맛있는 요리로 하루를 마무리하지?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간단하지만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나만의 공간에서 먹는다.
이보다 더 좋은 하루의 마무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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