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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r 24. 2020

금귤의 시간을 보내며

금귤로 만든 홈카페

이 작고 쓰고 신 과일을 무슨 맛으로 먹을까?


금귤이 '낑깡'으로 불리던 어린 시절, 나는 도대체 사람들이 왜 낑깡을 먹는지 몰랐다. 찝찝하게스리 껍질째 먹어야 하고, 달다기엔 쓰고 신맛이 나는 이 과일을 도대체 왜?


금귤을 다시 산 것은 금귤의 맛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져서였다. 여기저기 카페들에서 금귤로 디저트를 만드는 것을 보고 나니 금귤이 알고 보면 맛있는 과일인가, 아니면 유자처럼 과육을 그대로 먹지는 않지만 청이나 정과, 베이킹 재료로 쓰면 맛있는 재료인가 궁금해졌다.


그동안 모아놓은 레시피들을 뒤적이며, 어느 메뉴에 금귤을 넣어야 어울릴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머핀에 넣어보기로 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는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익숙해야 한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토대 위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안정된 곳에서 오히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은 홍차와 잘 어울린다. 특히 베이킹에서는 얼그레이와 오렌지, 레몬 등의 시트러스 계열 재료들을 섞는 것을 좋아한다. 얼그레이는 홍차에 '베르가못'이라는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 향을 입힌 것이다. 자연히 시트러스 계열 과일과 잘 어우러진다.



애써 다시 만난 금귤에 실망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트와이닝의 얼그레이 티백을 꺼냈다. 어느 분야든 믿고 가는 기본 선택지들이 있다. 트와이닝의 얼그레이는 늘 떨어지지 않게 구비해두고 베이킹의 재료로 사용한다. 차로 즐겨도 괜찮지만, 워낙 품질 좋고 다양한 얼그레이들이 많다 보니, 차로는 잘 마시지 않게 된다.


다른 과일도 마찬가지이지만 귤이나 레몬, 오렌지를 베이킹 반죽에 넣을 때 가장 주의할 점은 '수분 관리'이다. 구운 후 바로 먹는 게 아니라면, 과육에서 나온 수분이 반죽으로 퍼져 나와 점점 반죽이 물러진다. 과육을 듬뿍 넣은 머핀을 다음 날 만져보면 질컹질컹 거리는 것이 설익은 반죽처럼 변한다.


그래도 꼭 과육을 넣고 싶다면, 슬라이스해 반건조시켜 넣는 것이 좋다. 꼬돌꼬돌한 식감과 농축된 단맛과 향미가 오히려 풍미를 높여준다. 아니면 과육을 아주 작게 잘라서 조금만 넣어도 좋다.



얼그레이 티백 한 개를 뜯어 넣고, 앉은뱅이 토종 밀가루, 두유, 금귤 조각, 말린 금귤 슬라이스와 함께 머핀을 구웠다. 바로 먹으니 바삭한 겉면과 촉촉한 속 반죽의 식감, 금귤의 상큼하면서도 단맛이 잘 표현되어 화사한 봄 디저트의 느낌이 났다. 그 자리에서 한 개를 후다닥 먹고, 머핀 위에 유자청 글레이즈를 뿌려두었다가 하루 냉장 숙성해서 먹었다. 수분감 있는 머핀은 냉장 숙성해서 먹으면 더 맛있다.


요 며칠 봄 햇살이 해사하게 온 집 안으로 들어온다. 재택근무를 하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평일 낮의 봄 햇살을 마주한다. 오후 세 시쯤, 여전히 밀린 일은 잠시 제쳐두고, 홍차를 우려 금귤 머핀과 함께 먹는다. 이상하게 똑같은 햇살인데 주말 햇살보다 평일 햇살이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청개구리 같은 마음일까




남은 금귤을 뽀독뽀독 씻어서 그냥 그대로 먹어보았다. 금귤은 껍질 째 먹는 과일이라 깨끗하게 씻어주어야 한다. 베이킹소다 푼 물에 담가 둔 후, 천연 수세미로 빡빡 닦아 주었다. 이렇게 껍질을 닦아주면 껍질에 상처가 조금 나면서 상큼한 향이 온 집안에 풍긴다.


생각보다 맛있네? 어릴 적에는 껍질의 쓴맛을 왜 그렇게 맛없다고 생각했을까? 어릴 때 싫게만 느껴지던 음식들이 나이가 들면서 좋아지는 경우가 꽤 있다. 대체로 그 맛들을 종합 해보면, 씁쓸한 맛들이다. 씁쓸한 일들을 많이 겪고 나니 익숙해져서 일까.


반건조해 둔 금귤도 좀 남았는데. 금귤 라테를 해 먹어야겠다.


몇 년 전에 회사 앞에 '슈퍼 커피'라는 테이크아웃 커피 체인이 있었다. 거기에서 파는 오렌지 라테가 정말 맛있었는데. 다른 카페들에서도 간혹 팔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랑받는 메뉴는 아닌가 보다. 오렌지 라테를 파는 카페는 열심히 찾아야 보인다.


작게 조각낸 금귤을 찻 잔에 넣고, 그 위에 커피를 붓는다. 전동 거품기로 풍성하게 거품을 낸 비건 라이스 아몬드 밀크를 그 위에 얹고, 반건조 금귤 슬라이스를 올려주니, 와 예쁘구나.



지난주에 들여온 로즈메리 화분에서 잎을 몇 개 뜯어 얹어주었다. 역시 초록색과 주황색은 잘 어울려.


금귤로 머핀도 만들고, 라테도 만들어 먹는 동안 금귤의 계절이 지나갔다. 다시 금귤을 사러 집 앞 초록마을에 갔더니 이제는 금귤이 없다.


언제나 눈 앞에 보일 때 충분히 즐겨야 한다. 좀 더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아도, 휙 고개를 돌리면 사라져 버린다. 마치 봄 햇살이 그렇듯이, 저녁노을이 그렇듯이, 우리의 사랑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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