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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게 사랑하기

역시, 뻔한게 제일 좋아

by 단단

나에게 남편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아빠같은 보호자였다.


취향이 그닥 잘 맞지는 않지만, 둘다 호불호가 크지 않아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기도 하고, 각자 좋아하는 것을 할 때도 있다. 둘다 취미가 혼자 하는 것들이라 주말에는 늘 같이 집에 있거나, 같이 산책을 가거나, 장을 보고 음식을 해 먹으며 보낸다.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겁이 많은 나는 대범하고 무던한 남편에게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의지를 하는 편이다. 남편은 호기심 많고 늘 새로운 일들을 시도하는 나를 재밌어 한다.결혼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우리는 더욱 더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느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뭘 믿고 한 사람에게 내 인생을 다 걸듯이 살고 있지? 이 사람이 없어지거나, 헤어지거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내가 혼자가 되면 어쩌려고 나는 이렇게 대책없이 무모하게 사랑하고 있을까. 어쩌면 나는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던 일은 정말로 일어났다. 남편이 중동으로 2년 반동안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홀로서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보호자이자, 연인이자, 친구였던. 내 인생의 모든 관계였던 그가 일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처음 6개월은 늘상 울먹이며 보냈고, 자주 엉엉 울었고, 가까이 사는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운전을 하는 법을 배웠고, 부동산 재계약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 내 앞가림을 하는 '홀로서기 연습기간' 같았다.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듯, 한 가지씩 일들을 처리할 때마다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혼자서도 있구나. 생각보다 아니구나.



이틀에 한번 요가와 명상을 하며 마음의 중심을 찾아 나갔고, 책 읽고 글 쓰는 시간도 늘었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취미들도 갖게 되었다. 베이킹을 꾸준히 했고, 제과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베이킹을 하다보니 커피에 관심이 생겨 드립 커피 클래스를 들었고, 커피를 마시다 보니 위장이 나빠져 그 다음에는 차를 배웠다. 차의 세계는 베이킹이나 책의 세계만큼 매력적이어서 금새 빠져들었다. 티 소믈리에 자격증, 티 블렌딩 자격증도 차례로 취득했다.


1년이 지나자, '사는 재밌다' 감각이 생겼다. 평일에는 정해진 만큼 열심히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보낸다는 규칙적인 안정감, 그리고 그 안정감을 토대로 도전하는 새로운 일들이 즐거워졌다. 그런 마음이 들고 나니,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여유가 생겼다. 사소한 짜증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의 무례함에 크게 동요하지도 않고, 평화롭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도 잘 지내는 1년 반을 보내다보니 남편의 귀국날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반대로 덜컥 겁이 났다. 이미 혼자 여유롭게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져 버렸는데, 다시 남편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남편의 존재가 예전과 달리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어쩌지? 지금 내가 하는 취미들을 계속 하지 못하면 어쩌지?


돌아오는 남편이 당연히 반가웠지만, 나만의 행복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다시 남편과 살게 되고 두 달이 흘렀다. 신혼 기간, 떨어져 지내는 기간과는 또 다른 모습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여전히 나에게 그는 친구이자 연인이자 아빠이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떨어져 살기 전, 남편이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해 주는 아빠'였다면, 지금은 '혼자서 할 수 있지만, 함께 해 주는 파트너'라고 느껴진다. 오히려 더 고마운 마음이 든다. 취미도 여전히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혼자 사는 시간 동안 그냥 보낸 시간도 많았다.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보거나, 밤새 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실제로 책을 읽거나 베이킹을 하는 취미들은 하루에 한 두시간, 주말에 반나절 정도였다. 그 정도는 남편과 함께 살면서도 충분히 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언제든 혼자가 된다고 해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는 마음놓고 사랑하고 있다. 같이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더 많은 것들을 함께하고, 내 일상의 더 넓은 영역들을 내어주었다. 그렇지만 나의 중심은 언제나 내가 잡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감각이 나를 더욱 안전하게 만들어준다.


뻔하게 사랑해도 될까 걱정이었지만, 뻔하게 사랑하며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뻔하게 살아도 괜찮을 만큼 스스로를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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