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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높낮이, 여전히 필요한가요?

시대에 따라 말도 변하니까

by 단단

"문 여는 거 도와줄까요?"


아파트 1층 현관문은 자동 센서로 열린다. 사람이 문 앞에 서면 센서가 이를 감지하는데, 센서의 감지 거리는 성인의 키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아파트 현관을 드나들 때 문 안과 밖에서 기다리곤 한다.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며 현관문 안에 서 있던 남자아이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언젠가부터 아주 어린, 그러니까 5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참 어리다는 이유로 초면에 말을 편하게 놓는 것이 불편해진 게 계기였다.


"뭐 줄까?"


집에 오는 길목에는 작은 시장이 있다. 과일 가게 좌판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여든은 충분히 넘어 보이는 사장님이 물어보신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서른 즈음의 내가 까마득하게 어려 보일 테니 반말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내가 다섯 살배기 어린이들을 보는 마음이나, 여든 할머니가 서른 살 나를 보는 마음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다섯 살에게는 반말을 해도 되고, 서른 살에게는 존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나는 여든 할머니에게 반말을 듣고 싶지 않은 걸까?


서른은 어른이니까? 어른의 기준이 뭘까. 스무 살이 넘으면 어른일까. 그렇다면 어른답지 못한 스무 살 넘은 사람들을 나이만으로 존중해야 할까?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면 어른일까? 그럼 돈을 못 버는 사람들은 어른이 아닌 걸까.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기준이 있기나 한 걸까.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서른두 살 에게 중요하듯이 다섯 살도 그럴 것이다. 여든 할머니에게 존중받고 싶어 하면서 다섯 살 타인을 존중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런 생각의 끝에 내가 만나는 유일한 십 대인 아파트의 어린이들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존대를 하게 된 것이다.


회사에서 후배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말을 높이다가 조금 친해지면 말을 놓는다. 친근감의 표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그 편이 일을 시키기에도 편해서 같은 팀 후배들에게는 말을 놓곤 했다. 말을 놓으면 '해줄래?' '하자' '미안' 이런 말들이 부담 없어진다. 그래서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하거나 편하다는 감정과 관계없이 필요한 업무를 요청하고 부탁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의 언어에서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 그중 가장 마지막 단계가 '존대'라는 생각이 든다.


직급을 없애서 모두가 팀장을 제외하고 동일하게 팀원이 되어도, 어떤 회사는 사장까지 모두가 '님' 호칭을 쓴다고 해도 남아있는 게 존댓말과 반말이다. 물론 몇 년 내외의 연차나 나이의 차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누가 봐도 나보다 훨씬 오래 일한 사람, 누가 봐도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라는 '표면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관계에서는 여전히 말의 높고 낮음이 존재한다.


직급도 없고 신입사원도 없는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 그 차이를 더욱 실감했다. 호칭으로도, 연봉으로도, 직급으로도, 심지어 육안으로도 (나보다 10살 많은 팀원의 나이를 알고 너무 놀랐다. 그분은 나보다 기껏해야 두세 살 많아 보였다.) 높고 낮음이 없는 이 조직 안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존댓말과 반말이다. 물론,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말의 분위기'는 다르게 전달된다. 반말이 오히려 다정한 배려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그 말의 주인이 말의 높낮이를 이용해서 관계의 높낮이를 확인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높임말과 반말은 문화적 유산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나인 투 식스 대신 자율 출퇴근제를 도입한 것처럼, 출퇴근 대신 재택근무를 시행한 것처럼, 말의 높낮이도 그 형태를 달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권위는 신뢰에서 나온다. 나이도, 직급도, 반말도, 연봉도 아닌 신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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