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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나였으면

일터의 나 vs 진짜 나

by 단단

취미 하려고 출근한다는 글로 구독자수가 천명이 넘어섰다.


일에서 찾지 못한 의미를 취미에서라도 찾으려는 마음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구나. 일의 의미와 동료에 대한 글이 아닌 그 글이 조회수 1위라는 사실이 지금 우리가 가진 '일에 대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일에서는 정말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걸까?



취미로 하던 일이 직업이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베이킹 클래스를 운영하던 지인은 일이 바빠서 자기 시간이 없다면서 취미로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취미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취미를 하는 마음처럼 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출근하는 나 vs 퇴근하는 나



프로페셔널한 정장, 단정한 메이크업, 단호하면서도 효율적인 말투, 사무적인 미소.

퇴근 시간이 되면 그들은 화려하게 메이크업을 고치고, 활짝 웃고 떠들고,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껏 한다.


10년 전 영화를 보면 이런 모습의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했다. 회사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180도 다른 이들이 멋있어 보였다. 여기서의 대비는 주로 '외면적인 것들'이었다. 옷차림, 말투, 표정 같은 것들. 일하는 자아즐기는 자아 사이의 완벽한 '모드 전환'을 선망하던 시대였다.


회사 옷차림, 회사 분위기 같은 것들이 지난 10년간 많이 바뀌었다. 물론 지금 막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여전히 꼰대가 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바뀐 것들이 꽤 많다. (이런 표현... 꼰대 같지만)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고, 단정한 화장이 예의라는 생각도 흐릿해졌다. 이제는 어떤 화장을 하던, 아니면 화장을 하지 않던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명품백 대신 에코백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는 사람도 많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분위기도 자유로워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출근하는 나와 퇴근하는 나는 다르다. 회사에서 '진짜 나'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출근하는 내가 보여주는 모습은 이렇다. 주말보다는 단정한 옷차림, 정제되고 효율적인 말투, 동료들에게는 친절하지만 선을 지키는 태도, 회의시간에는 마음속에 꿈틀대는 아이디어를 적당히 누르고 '될 것 같은 말'만 하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퇴근 후 모습'을 들키지 않기. 주말마다 쿠키를 팔고, 글을 쓰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에 대해서 함구하기.


퇴근하고 사원증을 가방에 넣으면 다른 자아를 꺼낸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과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며칠 전에는 동네 책방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실천하는 독서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비건, 제로 웨이스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을 읽고 우리의 관점을 넓혀서 우리의 일상에 작지만 큰 변화를 일으켜 보자는 모임이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는 길, '이게 진짜 나지!' 이런 희열을 느꼈다. 각자의 가치관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나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뼈 속까지 느끼게 해 준다.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면 어떨까? 퇴근하고 글을 쓴다고, 투잡을 한다고, 마켓에서 쿠키를 판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회사에서의 내가 진짜 나라면 어떨까.



일이 나였으면



일이 힘들거나 지겨울 때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한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면서 가고 싶은 기업의 리스트를 만든다. 비즈니스 트렌드가 바뀌면서 관심 기업들도 매번 바뀌지만 공통적인 고민의 패턴이 있다.


지금과 비슷한 규모의 대기업으로 옮길지

가치관이 맞는 스타트업에 도전할지


이 고민은 의미를 일에서 찾을 건지, 취미에서 찾을 건지 선택하는 문제이다.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의 대기업이라면 퇴근 후 취미 생활을 위해 돈을 버는 일상이 계속될 것이다. 스타트업이라면 회사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취미생활을 할 시간이나 체력이 남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살인적인 업무강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도 다르지 않다. 경우에 따라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으로 인해 무의미하게 긴 업무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을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하는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나 하나쯤이야' 가 안 된다는 게 구속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 고민의 결론은 어떻게든 나는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지, 일하는 사람들이 내면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그런 환경들이 내가 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지. 나는 그런 부분들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쩌면,

취미 하려고 회사 다닌다는 말 뒤에서 내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이 나였으면 좋겠어.


내가 다니는 회사의 쇼핑몰에서 제로 웨이스트 콘셉트의 상품들로 기획전을 만들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택배 시스템을 제안하고, 비건 카테고리를 추가한다면 나는 이곳에서 의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보수적인 대기업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느리고, 섬세하지 못하니까 어렵겠지? 그렇다면 나에게는 역시 참거나 스타트업 기업에 도전하거나, 사업을 하는 방법만 있는 걸까?



내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



지난주에 같은 팀 동료들과 '텀블러 모임'을 가졌다.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고, 커피는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주문한다.


텀블러 모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리님이 가지고 다니시는 것과 똑같은 텀블러 선물 받았어요."

"와! 우리 그럼 쌍둥이 텀블러 기념 점심할까요?"


텀블러를 사용하는 다른 옆 자리 후배에게 말을 건넸다.


"텀블러 모임에 함께 할 생각이 있니?"

"오 영광이죠."


이런 식으로 4명이 모였다. 우리는 텀블러에 각자의 취향에 맞는 음료를 담아 회사 주변 벤치에 앉아서 남은 점심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텀블러 얘기를 하다가, 제로 웨이스트, 일회용품 이야기를 했다. 다음 주에는 멤버들에게 고체 치약을 선물하기로 했다. 집 앞에 새로 문 연 제로 웨이스트 샵에 가서 사 오겠다고 약속했다. 멤버 한 명이 오래전부터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고 있는 다른 회사 동료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우연한 시작이었지만,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고 있다는 뿌듯함이 생겼다. 거창하지 않으면 어때, 나의 정식 업무 중 하나가 아니면 어때. 텀블러 모임은 내가 회사에서 내 가치관을 잃지 않고 일할 수 있다 가능성을 알려 주었다.


어쩌면 회사에서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카페에서 책 읽는 모임을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한 번 혼자서 실천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을 꺼내보면 어떨까. 점심시간 1시간 동안 각자 가지고 온 책을 보면서 말없이 책을 보고 커피와 빵을 먹다가 돌아가는 모임.




일이 나와 같을 수 없고, 일이 나와 같아진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는 것. 그러다 보면 회사에서 써야 하는 가면을 조금 엉성하게 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은 저....

퇴근하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책도 많이 읽고, 베이킹도 하고, 주말에 쿠키도 가끔 팔아요!

곧 동네 책방에서 독서 모임도 진행할 예정이고, 티클래스도 열 거예요.

회사를 다니면서 이 일들을 다 해보고 싶어요.


혹시 관심 있으시다면 같이 해보면 어때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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