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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미 Aug 14. 2018

사람에게만 이야기해서
구할 수 있는 마음, 그에 대해

[책] 내게 무해한 사람_최은영


책을 손에 잡고선 여러 번 숨을 멈추고 창 밖을 내다보고 상념에 잠겼다. 7편의 이야기가 묶여 있는 이 책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서 맨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1984년. 작가는 나와 동갑이었다.

7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혹은 화자, 타자, 3인칭 누군가에게서 전부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라니...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디에서


'수줍게 혹은 일부러 고개 숙인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나, 남의 감정에 대한'


소설은 좀처럼 감정을 토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낮고 조용했으며 수줍기도 하고 숨기기도 했다. 어찌 보면 결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각기 다른 아픔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아파하며 슬퍼하고 때로는 담담하면서도 냉정한 감정들로 얽혀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십 대 혹은 이십 대의 자신을 회상하거나 타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 남긴 이야기처럼 자신의 지난날들이 스며들어 있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 역시 동시대를 살아왔으며 그 보다 더 가까이 등장하는 모든 것들과 맞닿아 있었다. 



<그 여름>의 수이와 이경은 동성 커플이다. 소설에 등장한 그들의 모습은 나의 선입견을 흔들었다. 공, 수라고 하는 말이 유행했던 학창 시절, 팬픽이라는 장르 속에서는 항상 공과 수가 등장했었고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동의한 적 없는 사회적 성 역할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지어놓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반이라는 말 대신 이반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신촌 놀이터에 짧은 머리 여자친구와 긴 머리 여자친구가 남들보다 더 친밀해 보이면 아마도 나는 짧은 머리 친구가 남성, 긴 머리 친구가 여성의 역할을 했을 거라 지레짐작하지 않았던가 싶다. 하지만 작가는 수이와 이경을 통해 그러한 시선을 저 멀리 던져내고 사랑, 우정에 대한 감정, 사람과 사람 간의 친밀함, 의존감, 배신감 등에 대한 오롯이 감정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었다. 초반부터 수이가 공일까, 이경이 수일까를 고민하거나 이경이 남자인가? 수이가 여자인가? 하는 저렴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소설의 후반부쯤에서야 나는 무언가로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멍해지고 혹 나의 이런 생각이 누구에게 틀키진 않을까 먼산을 응시하고야 말았다. 지금 이렇게 글로 고백하고 기록하는 것이 그 치졸함을 떨쳐 버리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여자에 대한'


어린 시절 나는 8층, 누구는 5층, 누구는 14층에 살면서 등하교를 같이 하고 친구들 생일파티며 교회며 우르르 몰려다녔던 시절 그 언저리에 <601, 602>가 있었다. 주영이는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동갑내기 효진이와 친해졌지만 그녀가 오빠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그것을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내버려 두는 그들의 부모를 목격한다. 친구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인 것이 누구에게 보다 창피해 비밀로 해달라고 말려도 그냥 가라고 말하는 효진이.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오빠에게 맞고 있던 효진이의 방에 들어선 주영이는 오빠의 로봇 장난감을 바닥에 내던지며 그 상황을 말려보려고 하지만 효진의 엄마도 심지어 자신의 엄마도 나서지 말라고 나선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남의 집 일에 나서는 거 아니야" "오늘 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라며 "넌 여자애야"라며 아들을 낳지 못해 집안에서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던 엄마를 이해하기란 주영이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아들만을 끔찍하게 여기는 효진이네와 주영이네는 도대체 뭐가 다르지.


스물두 살의 나이에 조카를 데려다 키우면서 내내 웃겨주고 싶고 즐겁게 해주고 싶어 하면서 자신의 삶의 어떠한 비루한 일부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던 숙모 곁에서 어린 혜인이는 고작 물을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불썅하냐"는 질문뿐이었다. <손길>에서 그녀들의 모습은 또 다른 형태로 그러나 시댁 살이, 마땅치 않은 며느리로 비쳐 아무것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던 스물두 살의 그녀. 정희.

혜인은 오랜 시간이 흘러 그녀가 선 무대를 바라보는 걸로 숙모, 나는 잘 지냈다고 말할 수밖에 없던 기억을 들춰내고 있다. 


어떤 내용도 희망적이거나 기대했던 바로 끝나지 않았다. 따뜻하고 온기가 있어 보이는 감정에서도 어느덧 이면의 서슬 퍼런 시선들이 머물렀으며 그 시선들 사이에 괴로워하는 인물 누구도 토해내지 않는 지나간 감정들이 해묵었다기보다는 현재의 화자들이 이해하기엔 아직도 더 살아봐야 할 거 같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끝나버렸다. 


작가가 여성을 다루는 시선은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많이 벗어나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에서 그들은 하나둘씩 자신의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여성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결국 여성이라는 것을 아주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이유인 즉 <601, 602>에서 주영이 여자아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더 이상 효진이네 집에 개입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퇴사하면서까지 아들을 낳으려고 애쓰는 엄마를 결국 이해하게 되고 자신도 어느 순간엔 그 상황에 도달할 것이라는 먼 이해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그 여름>에서 수이가 남성의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 역시 굳이 그 관계에서 그러한 사회학적 성 역할이 필요 없음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성'이라는, '여자'라는 생물학적 틀을 넘을 수 없음 또한 드러나고 있었다.



'저 멀리 보내 버린 나의 지난날들에 대한'


<모래로 지은 집>과 <고백>은 '셋'이라는 숫자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나의 십 대, 이십 대를 견줘볼 수밖에 없었다. 방황하고 모든 걸 다 아는 처럼 견뎌내던 이십 대의 나는 돌아갈 수 있다면 십 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었다. 삼십 대가 훌쩍 지난 지금은 만약 정말로 돌아가야 한다면 이십 대 후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학창 시절로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 소설은 나를 자꾸 그 학창 시절로 몰아갔다. 


모래와 공무, 나비가 등장하는 <모래로 지은 집>은 내가 나약하다고 스스로 지레짐작해 바라봤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날카롭게 끌어올리면서 나비와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니라고 조금씩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어 가고 싶어 하는 방관자적 모습의 공무와도 닮아 있었으며 대학시절 만난 친구에게 나를 버리지 말라고 소리치며 술 마시고 주정하던 그 모습은 못내 모래와 겹쳐졌다.

그리고 그 셋의 관계는 대학시절 나를 포함해 함께 다니던 두 명을 떠오르게 한다.

채팅을 통해 만난 셋은 그 당시 우리에게 얼마나 채팅이 중요한 다른 매개체였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왔던 다모임은 금세 동창 찾기로 불어나면서 학교에서 한 두 번 마주쳤지만 기억에도 없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만들었고 삐삐에서 시티폰, 핸드폰으로 넘어가던 시기에는 문자 메시지 하나하나에 집중하던 시간들이었다. 나도 그 시절 음악방송을 했고 채팅을 하면서 방에 틀어박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익명은 신선했다. 그리고 싸이월드가 등장한 날부터는 그 익명은 더 깊어져만 가면서 내심 못 만났던 미움 속에 있던 친구들을 염탐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들이 닉네임이 아닌 현실의 이름이 불려지던 소설 후반에는 결국 이렇게 현실은 어떠한 가상공간을 대체하기엔 당시 그들에겐 차갑고 아픈 것들로만 놓여 있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나 역시 나의 이십 대는 그러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선택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기 시작한 후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일지, 어떤 나일지, 어떤 사람일지가 사춘기엔 너무 중요한 것이었다. 나만 그랬을까. 

<고백>에 등장하는 미주도 그런 건 아녔을까. 셋이라고 하는 숫자는 때로는 아주 큰 힘이 되면서도 때로는 그 사이의 간극이 둘보다는 멀리 있는 듯한 쓸쓸함을 주기도 한다.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셋이었나 보다. 여느 드라마, 영화에서도, 이 소설에서 그러하듯 나의 삶에서도, 셋이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가끔 옛이야기를 하지만 연락은 하지 않더라도 가닿기를 바라는 한 명으로 줄어들었다. 

여섯이었다고 넷이 되었기도 했고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었는데, 결국은 나와 누구 하나 이렇게 된 지난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떠올라 그 시절을 헤집어 놓으니 이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누구나 있구나. 하는 순간 이것 역시 자기 위안이구나 싶은 마음으로까지 끌어내렸다. 


기대했다. 마지막 소설에는 희망이 있겠지. 무언가 그래도 깨닫고 청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누군가는 있겠지.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작가는 나를 나무랐다. 누구나 그렇지도 않으며 그럴 이유도 없으며 결국 사람 간의 따뜻한 온기 속에서도 냉정하고 서늘한 감정의 파편들이 살면서도 끝내 놓아지지 않고 존재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나에겐.


그러나 그중 한줄기 나의 희망이랍시고 찾자면 <고백>이라는 소설을 통해 미주는 수사가 된 애인에게 도무지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었던 열여덟 살의 상처를 이야기했을 때였다. 수사인 종은이 "신의 현존에는 분명 그가 말한 위안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라고.


무해한 사람이라는 것이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 혹은 해를 입히지 않아 평온한 사람일 수도 있겠으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은 무해한 사람보다 유해한 사람이 더 많으며 때로는 그 관계들 때문에 우리는 나를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는 어떠한 지점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였을까 라는 부분이었다. 사랑, 우정보다도 더 깊은 상처가 생기고 사랑, 우정, 그리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보는 시선마저도 차가워지고 돌아서게 될지라도 결국 사람한테 가 기대게 되는 그래서 <아치디에서> 하민이 어쩌면 사람이 동물보다도 더 밑바닥은 아닐까. 하게 되는 지점까지 이르러고 결국 우리가 울분을 토하거나 눈물을 참거나 상처를 외면하게 되는 모든 것들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내가 어쩌면 멀리 보내버린 들춰보고 싶지도,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지난날들은 아마 지금의 내가 조금은 유연하고 서투르게 싸우지 않으며 대충 넘어가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그것이 낫다고 스스로 합리화한 결과는 아닐까.


번잡했다. 그때의 나는. 복잡했고 아팠으며 한 시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러한 관계와 이야기들에 지쳐 한걸음 물러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하면서도, "사람에게만 이야기해서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갑게 맞이하게 하는 갈등을 선사하는 7편이었다. 모두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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