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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Nov 10. 2016

바라보는 가을, 제주 한라산

이미 입동이에요.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요.

제주에서의 마지막 가을을 위한 발악. 그중 하나, 아주 크게 맘먹은 것이 백록담을 보러 가는 일이다.

몇 주째 한라산의 단풍 동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절정의 시기가 언제라고 하더라, 성판악 길 쪽에 숲터널을 지나오는 동료에게 나무들이 물들었는지를 물어보며 마음을 다지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절정이 지났다고 할 때까지도 성판악을 지나오는 동료는 이제야 숲터널에 단풍이 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닌데, 이러다가 한라산 기슭에서 다 떨어진 단풍을 밟게 되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 뭐 그리 따져. 일단 올라가 보자 라고 다짐하고 그래도 숲 속이 아니라 그 숲을 멀리서나마 조망해보고 싶은 마음에 한라산 1100 고지 습지로 향했다.

차량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물든 단풍과 곧고 높게 솟은 나무, 그리고 너무나도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아 , 그냥 이대로 가을이구나 싶었다. 제주에서 이렇게 맑은 날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1100 고지 습지는 팔각정과 같이 휴게소가 작게 구성되어 있고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어 편하게 오가며 한라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 조성된 습지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받은 천연 생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코 끝이 살짝 시린 날이었다. 해발 1100미터이어서 느껴지는 싸늘하지만 뻥 뚫리게 하는 공기


이곳 1100 고지 습지는 별다른 입장료 없이 습지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만들어진 데크를 천천히 산책할 수 있다. 빠른 걸음으로 쭉 걸을 경우 15분 정도? 습지 생태도 보고 사진도 찍고 나무 냄새도 맡으면서 걸으면 한 30분 정도 걸린다. 나는 일행이 꽤 많은 집단 무리 속에서 걸어야 해서 제치지도 그렇다고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건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듯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산책로는 건장한 성인 남자 한 명 정도 지나갈 공간이고 방향은 일방이기 때문에 밀리듯이 가고 서듯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의 단풍 절정과 건천으로 유명한 제주에서 높은 고지임에도 불구하고 습지가 형성되어 있어 촉촉한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기분만큼은 상쾌했다. 한라산이 도저히 자신 없는 사람이라면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산책로를 한 바퀴 휘돌고 맞은편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 쪽엔 화장실, 주차장, 전망대 안에는 간단한 요기거리와 2층 테라스가 있다. 조금 더 넓게 한라산을 보기 위해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아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일 한라산을 등반할 생각을 더 설레게 만들 만큼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는 고루한 감상만 떠오를 수밖에 없는.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는 내일 왜 한라산을 오르려고 하는 걸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2012년 가을,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어느 쪽으로 올라가면 백록담을 볼 수 있을 줄 알고 제주시내에서 등산화와 등산복을 사서 무작정 올랐었다. 하지만 우리가 갔던 코스는 영실코스로 윗세오름까지만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우뚝 솟아 있는 백록담을 둘러싼 남벽만 보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 아쉬움 때문일까?

그때의 한라산의 가을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고 넓은 목초 지대, 빼곡히 들어선 나무 숲, 급 경사가 없이 산책하듯 올라갈 수 있었던 한가로움과 포근함이 존재했던 시간.

그때가 그리워서 일까?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쯤 나는 그 무엇도 아니라. 내가 제주에 있는 동안 애써 서울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가 볼 수 있고 백록담 한 번은 봐야지 하는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다시 습지 산책로로 향했다. 혼자 천천히 다시 걸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게 심란한 마음 한 켠이 조용해질 때까지 천천히 더 천천히 걷고 걸었다.


해가 질 무렵, 대정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노을 덕분에 간신히 조용해졌던 마음이 쿵쾅거리면 설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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