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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Mar 09. 2017

서울에서의 불면증

가장 쉬운 핑계를 삼아 도피 중입니다.

서울에 돌아온 후로 편히 자는 날이 적다. 그건 말하자면, 시도 때도 없이 잔다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집안일을 대충 마치고 나면 잠이 온다. 새벽 내내 뒤척였던 시간, 야식을 먹어서 부대끼는 속 때문에, 정수기 돌아가는 소리, 냉장고 울리는 소리, 추위, 코 고는 소리, 그 어떤 것들 때문에라도 예민했던 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어떨 때는 뜬 눈으로 지새우다 새로 이사 온 집이 곳곳에서 트는 보일러 소리로 지진이 난 것 마냥 울어대는 탓을 하기도 하고, 꿈속에 나타난 새로운 이야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더 잠을 청해 보기도 한다.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_수입이 없다는 것)이 때로는 속 편하게 느껴지다가도 더 많은 날들은 나를 불안 속에 머물게 한다. 함께 일하던 상사는 내게 끝까지 할 수 있는 만큼 부딪혀 보고 돌아와야겠다 싶으면 돌아오라고 뜨거운 의리를 남겼다. 하루에 수십 번 그 생각을 한다. 제주에 살면서 일을 하던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나 역시 그 생활들이 좋았다. 아침저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가 좋았고 차를 끌고 가까운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하루 종일 앉아 있던 것도 좋았으며 주말이지만 나를 불러 제주 투어를 가자 하는 상사들의 연락도 귀찮지 않았다. 하루는 길었다. 아침 출근으로 적응된 몸은 주말이어도 그 시간 즈음엔 일어났고 금요일 저녁 회식이라도 해서 과음한 상태로 토요일 주말 하루가 숙취로 가는 시간도 지금 돌이켜 보면 좋았다. 무엇 때문에 좋았냐고 묻는 다면, 혼자여서 좋았고 제주여서 더 좋았다.


서울로 돌아와 몇몇 그룹을 만났다. 미루어 두던 일 중엔 치과, 미용실을 가는 일이 있었고 엄마 집에 들러야 했다. 그 외엔 특별히 사람들과의 약속을 잡지도 않았고 돌아왔단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라 아는 사람 없이 있던 제주에서의 외로움이 굳은살 매긴 것 마냥 아프지 않듯 굳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외롭지 않아서였다. 미루던 약속들을 하나씩 이어가는 요즘, 내가 이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자꾸 한다. 만나서 함께 웃고 한잔 하면서 즐거웠던 시간 뒤로 오는 공허함이다. 어쩌면 혼자 있던 제주에서는 그 공허함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실로 자유롭고 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은 꼬리를 문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서로의 모습을 그려보며 지난 추억에 웃고 웃는 일이 세상만사 어떤 것들과 견주어 보아도 크게 손해 볼일 없는 따뜻한 장면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웃고 오지도 않을 미래를 오만함으로 장식한 말을 쏟아내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 틈 바구니에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그 어떤 모습에 대해서 한 줄 제대로 적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글을 쓸 자격이 있는 걸까 

생각은 그렇게 자꾸 꼬리를 물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로 그리고 나는 참 쓸모없다는 생각으로,


판타지 소설을 쓰겠다던 녀석은 홀연히 호주로 유학을 다녀와서는 요리를 하겠다고 하다가 화분 일을 하고, 함께 일을 하던 직장 동료이자 후배였던 그는 생전 관심도 없던 피규어 일을 한다고 하고, 한 두 달 쉬었다가 새롭게 구성된 팀들과 일을 시작하면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사람.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자신의 재능을 한껏 살려 그렇게 꿈꾸던 무대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선배.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1년 동안 지나간 두 번의 연애담으로 두 어시간을 이야기하며 웃던 언니까지.


한 때는 사람들이 내게 주는 영감으로 써왔던 글이나 잡았던 캐릭터들이 지금은 하나 같이 나와는 먼 이야기 같고 자꾸 뒤처져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를 채근을 하게 만드는 서울 생활 복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자꾸 상기된다. 노트 이곳과 저곳, 노트북, 작가의 서랍, 다이어리 등등 조각조각 펴져 있는 글들은 하나같이 끝맺음이 없이 허공을 떠돌고 있다. 드라마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후로부터 누구에게 내밀만한 작품 하나 없는 나는 먹고살기 바빠서였다고 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 난 이래서 서울 생활이 싫다. 조금만 느려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아무도 내게 말은 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가 나에게 생채기를 내기 바쁘다. 그것들을 외면하는 방법은 잠이다.

그러니 서울에서의 잠은 편할 수가 없다. 


무엇이 그리 잠을 편히 자지 못할 만큼 고민이냐고 묻는다면.

나의 고민은 '언제 놓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행복해야겠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놓았다. 그건 쫓을수록 무섭게 뒤통수를 쳐대며 그래서 넌 행복하냐고 자꾸 되물으니, 그 물음이 없는 어떤 상태가 때로는 더 행복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덜 불행해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족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은 놓지 못했다. 이것은 욕망과 관련된 이야기일 텐데, 무엇을 얼마큼 만족할 것이냐를 정하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한다.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글을 쓸 수 있다면 만족하느냐 그것은 아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쓰고 누가 읽고, 함께 할 수 있느냐, 그리고 내 삶에 대한 만족은 무엇인가. 행복과 분리되면 분리될수록 더 어렵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행복과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어느 한쪽이 어느 정도 됐다는 이유로 다른 한쪽을 포기하지 않게 될 테니.


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포장했던 시기는 속절없이 지나갔다. 자신감은 점점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때론 꿈이 없는 삶. 허황되게 좇는 것이 없는 어떤 눈 앞의 목표를 향해 가는 삶이, 꿈을 좇아 허우적대는 나보단 낫지 않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꿈이 있어서 불행한 것과 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은 차이가 없다. 꿈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것을 불행이라고 일컫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 세상이 통속적으로 쓰는 그 어떤 의미가 아니라, 행복, 만족, 꿈과 관련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나의 삶의 방향은 그것들을 어떻게 잡아 쓰고 있는 지를 아는 것이 먼저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수선하다. 


예전에 한 책에서 고추를 먹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혹시라도 단 고추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눈물이 나고 괴롭고 맵고 힘들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먹었다는 것이다. 때론 우리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고추가 단 것이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우리는 혹시 모를 단 고추를 찾는다.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가 그에게 달고 단 노란 고추가 있을 거라고 말해줬다면. 그것을 신뢰하는 경우 허황되었든 간에 그는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매운 고추를 먹고 있을 것이다. (_때로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신 스스로 일 수도 있다. ) 믿음이 결국 자기 안의 확신이 되는 순간, 그것은 욕망도 욕심도 아닌 것처럼 제 몸이 되어버려 더 이상은 먹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언저리쯤 온 것이 아닐까. 


나는 이유를 찾고 있다. 꿈을 놓기 위한 이유. 그러나 도무지 그 이유가 찾아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 시험을 못 보거나 하루 종일 어떤 일이 잘 안 풀리면 엄마, 혹은 아빠 탓을 한 적도 있다. 그건 철없던 그 시절 가장 쉬운 도피처였다. 엄마 때문이야. 으앙. 아빠 때문이야. 뭐 이런 거 말이다. 엄마, 아빠는 아무 말 없이 괜찮아 라고 했던. 그렇게 도피하고 정작 위로받을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위로받고 돌아섰던 작은 순간들. 지금도 그럴만한 핑계는 없는지 둘러보고 있는 나를 본다. 그런데 거기까진 돌아갈 수가 없다. 먹어왔던 시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다. 남들도 나처럼 한 포대씩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와서 누구의 것을 빼앗을 수도 없고 이제 와서 새 포대를 열 만큼 순진하지도 않은 나 때문이다.

결론은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나 자신, 혹은 남들의 시선도 두렵다면 일단 남은 포대의 고추를 다 먹어보고 누군가에게 소리쳐야 할 것이다. '거봐, 없잖아.!'...... 그러나 누구에게 소리친단 말인가?

아니면 정말 달고 단 노란 고추가 나오던가.  그 책의 말미에 아마도 노란 고추는 없다는 말이 있었던 듯하다. 결국 고추를 다 먹은 것이 끝인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 책은 그러니 허황된 욕심은 버리는 것이 좋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또 욕심의 방향, 행복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곳에 가져다 쓴 의미와는 다르게도.,


서울에서 잠을 못 자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로부터의 나를 이기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불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쉬운 곳으로, 현재 도피 중인 것 같다. 서울에서 잠을 잘 잘 수 없다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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