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이지 않는 스위스의 겨울, 그 초입에서 잠시 멈춰 고요함에 머문 시간
본격적인 스키 시즌이 시작하기 전, 11월과 12월의 스위스는 무엇을 하기에는 애매한 날씨이다. 겨울의 초입이라 날씨는 점점 춥고 쌀쌀해지고, 아침은 늦어지고 저녁은 빨라진다. 특히 최근 몇 년 11월과 12월의 스위스는 비가 잦아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하루 종일 비가 주룩주룩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 중간에 잠시 비가 멈출 때가 있는데 그때 빗소리의 부재가 주는 잠깐의 적막이 나름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그러다가 햇볕이라도 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나는 이런 애매하다면 애매한 시즌에 태어났다. 12월 중순에 생일이 있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는 파이널 공부하느라 바빴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연말결산 업무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디셈버 베이비의 장점이라고 하면 아직 여행 비수기라는 것과 본격적인 연휴 시작 전 다들 각자의 고향으로 가기 전에, 생일이라는 이름아래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이라는 것이다.
생일을 맞아 어디서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고민하던 중, 제네바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Vevey라는 작은 마을에 눈여겨보던 호텔의 좋은 deal 을 발견했고, 비수기를 이용해 ‘호캉스’를 하기로 했다. 평소에는 하룻밤에 500프랑에서 1000 프랑까지 하는 호텔이 가끔 비수기 때 반값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가격으로 나올 때가 있다. 사실 스키나 하이킹 같은 액티비티를 하러 가는 여행이 아니고 호텔에 쉬기 위해만 가는 건 나의 여행 스타일과는 약간 거리가 멀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곳에서 자는 설렘보다, 내가 항상 자는 침실, 매트리스, 그리고 내 베드시트에서 자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자는 것에 예민해져서인지 눈만 높아져서인지 호텔 고르는 것도 일처럼 느껴지는데 가끔 리뷰가 좋은 스위스 5성급 호텔에서 좋은 가격으로 묵을 기회가 있으면 별 고민 없이 지갑을 연다. 스위스 5성급 호텔은 서비스는 물론, 레스토랑, 스파나 수영장 같은 부대시설, 그 안에서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기에 이왕 쉬는 거 조금 더 편한 쪽을 고르게 된다.
스위스 레만 호수 옆, 작은 도시 Vevey(부베). 크지 않지만 호숫가 풍경이 아름답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내가 좋아하는 동네다. 특히 여름이면 호숫가를 따라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고, 테라스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와인 한 잔 하기 딱 좋은 곳이다.
겨울의 부베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다. 눈 대신 자주 내리는 비와 안개로 흐린 날이 많지만, 산 중턱에서 안개 사이로 바라보는 레만 호수는 그 나름의 낭만을 품고 있다.
부베에서 퍼니큘러를 타고 오르면, Mont-Pèlerin 언덕 위로 Le Mirador Resort & Spa가 자리한다. 스위스는 세계적인 호텔학교가 많은 나라답게, 이런 작은 마을에도 훌륭한 5성급 호텔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이 호텔은 규모도 크고, 옆 건물에는 병원과 레지던스까지 함께 있어 부유한 사람들이 휴양과 요양을 동시에 즐기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런 곳에서 몇 달 머물며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케어를 받는다면 어떤 병도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크인 전부터 이메일로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는 서비스는 역시 5성급답다는 인상을 주었다. 비수기라 조용했고, 호텔 안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둘러본 뒤, 연인이 생일 선물로 준비해 둔 프라이빗 커플 스파룸으로 향했다. 호텔 방보다 더 큰 프라이빗 스파룸은 우리만을 위한 건식 사우나, 습식 사우나, 레만 호수가 보이는 자쿠지, 샤워실, 그리고 커플 마사지 베드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절대 빠질 수 없는 샴페인까지!
사우나를 오가며 땀을 빼고, 샴페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자쿠지에 몸을 담그고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니 그때서야 바쁘게 뛰던 마음이 잠시 진정이 되었다.
스파를 할 때면 늘 느끼는 감정이 있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며 잊고 지냈던 ‘나를 위한 돌봄’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깨닫는다. 물론 돈과 시간의 부족이 나의 가장 쉬운 변명이지만, 이렇게라도 잠시 멈춰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하다 보면 안 보였던 내가 보인다. 루틴으로 가득 찬 일상을 살다가 이렇게 일상 밖으로 나와서야 나의 굳은 어깨, 뻣뻣한 목, 긴장으로 무거워진 내 몸의 상태가 보인다.
평소엔 자기 계발이라며 온갖 것을 배우고 시간을 쪼개 쓰면서도 정작 진짜 쉼에는 인색했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온전한 휴식을 선물하니, 긴장된 몸과 조급했던 마음이 동시에 누그러졌다.
이렇게 하루 종일 온전히 나에게 집중한 날이 있었던가. 특히 나의 몸에 대해서 말이다. 몸은 거짓말 안 한다는데 나의 긍정과 감사요법도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풀어주지는 못하나 보다.
둘이 조용히 보낸 생일, 안개 낀 레만 호수를 바라보며 누워 고요히 쉬어간 그 시간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표지사진은 그다음날 아침, 호텔방 테라스에서 찍은 레만호수의 전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