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려고 애쓸수록, 멀어지는 순간
생각보다 눈이 일찍 내리기 시작한 2024년 겨울. 하이킹 시즌이 끝나면, 그다음부터는 손꼽아 기다리는 건 스키 시즌뿐이다.
스키를 처음 배운 건 초등학교 2학년 때, 용평리조트에서였다. 그때 울면서 배웠던 스키가, 캐나다도 아닌 스위스에서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겁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한국이나 캐나다(동부)의 스키장과는 확연히 다른 스위스의 스키장은, 더 높고, 더 넓고, 더 자연 그대로다.
한마디로, 더 무섭다.
특히 스위스 슬로프에는 절벽에 보호막 같은 것이 없다. ‘알아서 조심하라’는 식이다.
게다가 워낙 넓고 커서, 만약 내가 길을 잃거나 눈 속에 묻히기라도 하면 누가 날 찾을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이런 상상은 금세 두려움으로 번진다.
그래서 나는 늘 말한다. 스위스에서 스키를 탈 때는 꼭 친구와 함께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농담처럼 덧붙인다.
‘스위스 스키어들의 실력을 믿어. 내가 위험해 보이면, 다들 나를 알아서 피해갈 거야.’
한 번은 부모님이 내 스키 타는 영상을 보시고, ‘등만 봐도 긴장감이 느껴지더라’고 하셨다. 그 아우라 덕분에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피해간다는 말에, 웃음이 났다.
2024년은 어느새 스위스에서 보내는 일곱 번째 겨울이다. 겨울이면 해는 짧고, 고도가 낮은 지역에는 안개가 자주 낀다.
사람들은 스키를 짊어지고 산 위로 향한다. 나도 그중의 하나이다. 스키복을 입고, 스키부츠 배낭을 매고, 한쪽 어깨에는 스키를 걸치고 부지런히 기차역으로 향한다.
스키 시즌 주말에만 운영하는 제네바-베르비에 직행 열차가 있다. 아침 일찍 꼬르나방역으로 가서 이 기차를 타면, 베르비에 슬로프까지 바로 데려다준다.
제네바에서 약 2시간 거리, 세계 최고의 스키장 중 하나로 여러 차례 꼽힌 베르비에 (Verbier). 여름엔 클래식 음악 축제인 ‘베르비에 페스티벌’이 열리고, 겨울엔 스키의 성지로 변한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가 공존하는 이 마을은, 능력만 된다면 은퇴 후 살고 싶은 ‘나의 스위스 최애 동네’다.”
공식 시즌 오프닝은 12월 중순이었지만, 눈이 많이 온 덕분에 스키장이 조기 오픈했다.
들뜬 마음으로, 11월 말 베르비에로 향했다.
더 많이, 더 잘 타고 싶다는 욕심으로 나선 첫 시즌이었지만, 예상보다 내 실력은 한참 뒤처져 있었다.
눈은 많았지만, 두께는 얇았다.
그 얇은 눈이 주는 심리적 위축, 시즌 초반에 다치면 안 된다는 부담감, 그리고 연말이라는 가장 바쁜 업무 시즌에 다쳐선 안 된다는 눈치까지.
이 모든 것이 얽히며, 이번 시즌 첫 스키는 정말 최악이었다.
‘왜 작년보다 못 타지?’
‘더 잘 타야 하는데…’
그런 생각에 몸은 점점 굳어졌고,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할머니처럼’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사실 스위스 할머니들은 나보다 빠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급자처럼 느려진 거였다. 원래 잘 타던 코스조차 턴마다 멈춰 서야 했고, 결국에는 “피자” 자세로 내려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엇보다 한 번 생긴 두려움이 내 몸을 짓눌렀다. 즐기려고 시작한 스키가, 어느새 ‘잘 타야 한다’는 강박으로 바뀌어 있었다.
테니스 선수들의 멘탈 트레이닝을 다룬 『The Inner Game of Tenni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Do not try too hard.”
기술이 아닌 감각에 집중하고, 몸의 직관에 맡길 것. 그럴 때 오히려 최고의 기량이 나온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 와닿았다.
아쉽게도 이 책은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바이올린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11월 베르비에에서 시작한 나의 첫 스키 시즌은, 걱정과 두려움 속에 열렸다.
다행히 인내심 많은 스키 메이트들의 기다림과 격려,
그리고 몇 번의 넘어짐과 어려운 슬로프를 반복한 끝에,
시즌 중반쯤부터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 자신에 대한 과한 기대’가 결국 내 발목을 잡았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베르비에,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사실 베르비에는 잘못이 없다는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다.)
**표지사진은 2024년 11월 30일에 찍은 베르비에 사진이다. 아래사진은 리프트에서 찍은 사진. 11월 말인데도 눈이 꽤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