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스며들 것인가 꼿꼿하게 버틸 것인가
8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내가 접해본 영어 공부는 뭐든지 미국식이었다.
완벽한 R발음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혀를 굴려보던 그 시절, 조금이라도 더 굴려볼까 싶으면 옆의 친구들은 이렇게 한소리를 하곤 했다.
어우 야 그럴 필요 있냐, 대박 완전 느끼해, 너가 무슨 미국인도 아니고~
하지만 난 아무리 느끼해도 그들처럼, 그들과 똑같이 발음하고 싶었다!!
미국 영어를 배우며 자라온 나로서는 미국 발음/악센트만이 전부인 줄 알았다. 영국 발음?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중학생 때 한 달 다녀온 사이판의 영어 학교 파닉스(발음 수업) 시간에서 가르쳐 준대로 "노 프라블럼!(No problem)"을 완벽하게 발음하기 위해 입을 더 크게 벌렸고 R을 더 굴렸다. 좀 더 물 흘러가듯, 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듯 미국인들이 하는 그런 식으로!
하지만 웬걸,
좀 더 큰 세상으로 나와보니 미국 발음은 영어 발음 하나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2010년, 말레이시아에서 랭귀지 코스(영어학원)를 다닐 때 처음으로 접해본 싱가포르 영어, 인도 영어, 호주 영어, 아랍 영어 그리고 말레이시아 영어는 꽤나 신선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싱가포르에 놀러 갔을 때 원어민인 남자친구보다 싱글리시(싱가포르식 영어)를 더 잘 알아 들었다.
"어라? 이런 악센트를 가진 사람들도 있네? 내가 봤을 땐 원어민이 아닌 거 같은데(미국 발음이 아닌데) 쟤네들은 자기들이 원어민이라네?"
중학생 때 사이판에서의 첫 "외국인에게 배운 영어 공부", 대학생 때의 영어 공부를 위해 선택한 말레이시아 생활, 그리고 대학 공부로서의 골 때리는 영문과 수업들.
영어공부의 여러 과정을 거쳐온 나는 꽤 최근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겪어보면서 영어 악센트, 발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호주 멜버른에 위치한 (여러 군데의) 카페들에서 일하던 3-4년 전의 그 때 그 시절, 다음의 대화는 너무나도 익숙해서 나중에는 매뉴얼처럼 외워버릴 지경이었다.
에피소드 1
손님: "너 어디에서 왔어? 영어 잘하네?"
글쓴이: "나 한국인."
손님: "오 그런데 미국식 발음을 쓰네."
글쓴이: "한국에서 미국 영어를 배우면서 자랐거든."
에피소드 2
손님: "호주 언제 왔어? 호주 영어 쓰네?"
글쓴이: "한 1년 전? 다른 사람들은 나 미국 영어 쓴다는데."
손님: "아니야, 완전 오지(Aussie/호주인)인데?"
글쓴이: "고마워(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라.). 근데 난 한국인 악센트를 써, 난 한국인이니까."
호주에 넘어오자마자 얼씨구나 좋다 하고 바로 잊어버린 것은 미국 발음 중 하나인 느끼한 R발음이었다.
호주 사람들은 R을 가볍게 툭 버리듯이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 Water(물)를 예시로 들어본다면 미국 영어는 워럴이라고 발음하지만 호주 영어는 워터 혹은 워러라고 발음한다.
"이때까지 굴리려 굴리려 그렇게 노력을 한 R발음을 이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하며 바로 내 기억 저장고 속에서 지워버린 이 발음. 하지만 다 잊었다고 생각한 이 발음이 지금 돌이켜보니 내 안에 아직 상주하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장을 말할 때면 가끔 얼~~~ 알~~~ 하는 발음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밖에도 토마토를 토메이토가 아닌 토마-토로 부른다던지의 사소하지만 충격적인 발음 차이를 배우고 기억 해내가며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다.
아이엘츠 시험을 보고 온 친구들이 공유하는 후기나 팁 중에서 "한 가지 악센트를 정해야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라는 것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이 시험을 보는 목적이 비영어권 사람들의 영어 능력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영어 능력의 Consistency(일관성)를 보는 것이구나 하고 수긍은 갔다. 그리고 좀 더 호주 영어로만 발음하기 위해서 좀 더 신경을 썼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에서 이 영상 클립을 보게 되었다.
동영상을 요약하자면,
거주하는 곳 혹은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 따라 나의 발음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고, 여러 가지 발음 섞이면 뭐 또 어떤가, 이것 자체로도 매력이지! 하는 내용이었다.
아하! 하며 무릎을 탁 내쳤다.
이 영상을 보고 나서부터는 내 발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들릴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나만의 발음으로 의사소통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고 자신감이라는 무기까지 장착했으니 나는 문제없다는 마음으로.
글쓴이의 더 많은 영어 공부에 관한 이야기는 밑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brunch.co.kr/@melbeducatorb/14
https://brunch.co.kr/magazine/hojuenglish
모두의 애나
호주, 멜버른에서 차일드케어 에듀케이터로 일하며 먹고살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mandooanna
www.instagram.com/mandoo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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