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을 미워하다보면
칫솔을 자주 바꾸는 게 버릇이던 때가 있었다. 칫솔모가 조금이라도 헤지면 그게 싫어서 자꾸만 새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아직 쓸 만한데도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참 쓸모없는 짓이었고, 참 낭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쓸데없는 완벽이라도 추구해서 내 미운 구석을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겉이 말끔하면 속도 괜찮을 거라 믿었던 것처럼. 새 칫솔로 이를 닦으면 마음 어딘가의 찝찝함까지 씻겨 내려갈 줄 알았던 것처럼. 하지만 미운 구석은 칫솔을 바꾼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단짝 친구를 대놓고 질투하고 시기했던 일도 있었다. 그 아이가 잘되는 게 싫었던 순간들. 왜 나는 저만큼은 아닌지, 왜 나는 저만큼 빛나지 못하는지 속으로만 끓이던 시간들. 가깝고 편한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쯤은 허용될 거라 생각했다. 이 정도는 솔직함이라고, 이 정도는 친하니까 괜찮은 거라고. 그건 오만이었다.
가장 큰 예는 가족이었다. 내게 너무나 무해한 사람들. 너무 무해해서 나의 미운 구석도 그들 앞에선 똑같이 무해할 줄 알았던 어리석은 착각. 나는 그들에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자꾸 줬다. 그땐 그걸 몰랐다.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이해해줄 줄 알았다. 나를 사랑하니까, 내 미움까지도 괜찮을 줄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나의 미움을 무척이나 사랑했나 보다. 미움을 정말로 미워했다면 어떻게든 내게서 떨쳐내려 했을 것이다. 시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와도 부끄러워하며 감추려 했을 것이고, 아닌 척 연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안에서 그 감정을 키웠다. 합리화했고, 정당화했고, 어쩌면 은근히 즐겼다. 내 미움을 나는 얼마나 사랑했으면 잘못된 줄도 모르고 내 안에서 키우고 또 키워 결국 콩깍지에 제대로 씌인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그 미운 구석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남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건 무해하지 않구나. 이건 그냥 흉이구나.
미움을 미워하다 보니 자꾸 책과 가까워졌다. 남의 문장을 빌려 내 속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글을 쓰면서 나를 고발하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미움을 없애려 했을 뿐인데 나는 점점 나를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알게 됐다. 나의 미운 흉을 품을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을 하게 된다는 걸. 내 흉을 인정하고 나니 남의 흉도 조금은 보듬을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흠이 보이면 실망부터 했는데, 이제는 ‘저 사람도 저만의 수리 과정을 거치는 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흉통이 작은 사람의 숨이 더 큰 법인 것처럼 말이다. 작은 상처를 오래 품어본 사람일수록 남의 아픔에 더 크게 숨을 내어줄 수 있는 것처럼.
솔직히 지금도 완전히 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 미운 구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질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괜히 예민해지는 순간도 있다. 가끔은 여전히, ‘나는 왜 이럴까’ 싶은 날도 있다. 그치만 이제 괜찮다. 적어도 그 구석을 사랑하지는 않으니까. 그 구석과 나는 좋은 이별을 했다. 완전히 내보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끌어안고 자랑하지는 않는다. 그저 옆에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의 일부로, 그러나 나의 전부는 아닌 채로.
아무래도 영원히 수리 당할 노릇이긴 하다. 한 번 고쳤다고 끝나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다시 부끄러워하고, 또다시 인정하고. 그렇게 조금씩 다듬어지는 일. 하지만 책과 글로 수리 당할 노릇이라면 영원인들 뭐가 무섭겠는가. 고쳐지지 않는 나를 미워하기보다 고치고 있는 나를 믿어보기로 했으니까.
미움을 미워하다 보니 나는 조금씩, 사랑하는 쪽으로 고쳐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