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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설공주 Jun 13. 2021

김치 부자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라면을 먹을까

5월이 중간을 들어서면 김치 아니 김장철이  시작된다. 겨울의 우기가 시작되려 하면 어데서 배추를 사느냐고, 김장은 했냐는 얘기가 첫인사가 된다. 계절도 절기도 반대인 남반구의 우중충한 겨울에 김치가 없으면, 고등어캔 김치찌개,  빈대떡,  김치전 하고 볶음밥, 뭣보다도 라면을 못묵는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예나제나 김치는 내게 맨 마지막 선택지이다. 밥상 위의 젓가락이 다른 데 갈 곳이 없어서 허공을 휘저을 정도가 되어서야 가는 곳이다. 그런들 어떠하리, 이민 이후부터는 김치가 없는 밥상은 영혼과 삶의 빈곤을 드러내는 상징어가 되어버렸다.  김치를 담가 먹고, 담가 먹을 형편이 된다 하는 행위에는 숨길 데 없는 약간의 풍요와 허영과 여유 등의 온갖 감정들이 들어간다.

홀로 가족이거나 부부만 있는 경우 사서 먹는 것이 편하다, 싸다, 맛있다 등의 형용사가 들어가긴 하지만 그와 함께 외로움과 노년이라는 느낌이 먼저 와 버린다. 언젠가는 나도...? 하는 마음이 한 자락 깔린다. 너무 바빠서, 배추를 못 구해서, 맛이 없어서 등이 따라오면 대체로 이민 1세대의, 나도 한때 시간도 정보도 여유라고는 송곳 꽂을 새가 없었던 그 시절이 생각나서 짜안해진다.


우리 집 김치는 거의 남편이 담는데 그리 된 지 3년이 넘은 것 같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무렵에는 상대적으로 내가 좀 더 바빴다. 배추를 고르는 안목에서 남편이 까다롭고 우위를 점한다, 는 사연이 있는데 이쯤되었으니 자동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한국 농장도 있고 중국 농장도 있지만 차이니스 캐비지라고 불리는 배추가 농장, 지역, 종자에 따라 모양과 식감이 다르고, 묵은지가 저장식의 새로운 블루 오션이 되면서부터 김치의 활용도가 넓어졌다. 배추는 사는 것은 단연 남편의 몫이고, 다듬어 절이고, 씻어서 양념에 치대는 전 과정을 남편 혼자 오롯이 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이틀 또는 사흘이 걸리는 그 공정 어디에서는 내 손이거나 잔소리들어가야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맛있다고 하는 우리 집 김치이지만, 올해는 꼭 내 손으로 담고 싶은데 남편은 내년부터 하라고 한다.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몰라도 올해 김치 맛을 보고서도 그런 생각이 나면 양보하겠다고 한다.  


올해 우리는 아직 김장을 안 했다. 한국 농장에서는 배추 농사를 다 베렸다고 하고, 남편이 신용하는 야채가게의 배추가 성에 차지 않아서 아직도 미루고 있다. 이러다가 김장 못하면 어쩔? 하는 내게 남편은 손사래를 친다. 꺽쩡 말라고 곧 넬슨에서 배추가 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짐작컨대 여전히 남편이 짬짬이 담아둔 김치가 여유가 있는 것 같다. 


친구 집에 갔더니 김장 안부를 묻는다. 대답이야 정해 있는 것이라서 앞에 했던 얘기를 되풀이했다. 식탁 위에 찐 단호박과 엊그제 담갔다는 김치통이 있었다. 호박이 맛있어 보인 데다 생김치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자꾸 어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냥 맛만 본다 하고 시작했는데 이럴수가, 김치에 설탕이라고는 일도 안 넣고 양파와 맛없는 사과를 넣었다는데 단호박의 단맛이 찰떡궁합을 이루었다.  내가 하도 맛있게 묵고 있으니까 주인장은 신이 나서 더 먹으라고 더 먹으라고....


사진속의 푸른색은 무청처럼 보이지만 마당에서 키운 붉은 갓이고, 노란색이 띠는 길쭉한 것은 맄이라고 부르는 녀석인데 파보다 싸고, 김치 국물이 자작한 것은 배추를 가볍게 절였더니 물이 나왔다고 하고, 군데군데 덩이진 것처럼 보이는 양념들은 양파와 사과이고, 찹쌀밥을 질게 지어서 양념을 섞어서 갈았고, 포기김치가 성가셔서 막김치를 담았다고 했다. 빨리 익으라고 식탁 위에 뒀다는데 내 입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언제나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권하는 대로 다 묵고 물 한잔을 더 했더니 이제는 배가 불러서 아뿔싸였다. 이 문제는 해결될 가능성이 시야 제로점이다.

시간이 되어서 일어서려는데 김치 좀 줄까 하는 말에 아주 반색을 했다. 주인장은 주인장대로 내 반응에 훅 갔던 것이 틀림없다. 그 통에 있던 걸 다 싸줘서 나는 맘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한 후배가 음식 얘기 특히 한식 얘기를 많이 물어본다. 기중에 김치가 주제인 경우가 많은데, 같이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한국 갔다 오는 길에 요리 책과 김치 책을 선물한 적도 있는데 참고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편이 뉴질랜드 랜더이지만 우리 음식 잘 묵고 좋아한다. 때가 때인지라 김장 얘기가 시작되었는데 얼마 전에 김치를 담았다고, 그 녀석이 우리 집에까지 왔다.


언니, 김치 맛 좀 보세요.

아니, 그 귀한 걸 먹어도 돼?

귀한 거라서 드리는 거예요.

그래도 이거 묵어서는 안 되고 모셔놔야 될 것 같은데...?


세상에나! 포기김치였다. 듣자 하니 이웃에 사는 말레이시안 주부가 같이 김치를 담자기에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웃도 남편이 김치를 좋아해서 시작된 일인데, 적어준 대로 준비해왔고 후배도 그렇게 준비해서 일이 커졌는데 맛이 있었다'는 말이 방점이었다.

맛을 보니까 살짝 드러난 생강 향이 좋았다. 뜻밖에도 나박 썰기로 넣은 무우가 나 혼자 웃게 했다. 그리 두드러진 맛은 없지만 양념을 제대로 만들었고 우리 남편까지도 '좋다고'하는 걸 보니 나름 작품이었다. 두 가정이 김치를 만들고 먹으며 즐거워했던 순간을 우리 집까지 나눠주었다.

어제 동생에게서 온 김치다. 한 달 전에 50포기를 담았다니 말 그대로 김장을 했다. 네 식구가 나서서 담았는데 조카애 둘이 버무린 김치 가운데 몇은 양념범벅 아니면 하얀색이었다고, 조금씩 손을 봐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쉬웠다고 한다.  처음 이민 와서는 김장도 같이 했는데 그새 많이 컸다(?). 김치에 새우젓을 좀 넣는다며 그 덕에 맛이 깔끔하다고.

기중 제대로 식을 갖추어 담은 맛이 난다. 심심하고 깔끔해서 밥도둑이다.


세 가정 모두가 조미료라는 물건은 없는 집들이고 자연의 선물에 일손과 마음, 정성보탠 귀한 녀석들이다.

갈수록 김치보다 더 선물이 없는데 올해는  대박, 푸짐하기 그지없다.

생김치, 묵은 김치, 막김치, 포기김치. 


와!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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