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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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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리 Nov 20. 2018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바깥에는 첫 눈이 내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지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고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어릴 때 시골의 외갓집에 놀러 가면 방 문간에 걸려있던 그림에 적혀있던 시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데르 푸쉬킨의 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푸쉬킨의 시 중에 제일 많이 알고 있을 작품이다. 엄마와 이모들이 어렸을 적에 사용했다는 그 방은, 큰 방 두 개가 미닫이 문을 끼고 붙어있었다. 마루 제일 끝에 붙어있는 그 방은, 주로 나와 사촌들의 놀이 공간이었다. 조금만 시끄러워도 호통이 떨어지던 우리 할아버지의 시야에서도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이고, 미로 같은 집 구조 탓에 앞마당으로도 뒷마당으로도 바로 나갈 수 있는 방이라 다들 그 방에 모이곤 했다.


 여름날이면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방 안 선풍기의 줄을 당겨 달달달 돌아가게 두고 하염없이 그 방의 대나무 자리 위에 누워있곤 했다. 문간의 벽에는 소가 밭을 가는 그림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그 액자에 푸쉬킨의 시구가 쓰여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매번 방학이 되어 외갓집에 갈 때마다 나에겐 나와의 맹세 같은 것이 있었다. 저 시구를 다 줄줄 외워야지, 그래서 다음 해 여름에 올 때까지 기억했다가 완벽히 외워 내는 거야! 하는 나만의 맹세. 절대 종이에 적지 않고, 속으로만 외는 거다. 줄줄. 일곱 살 때 시작한 나만의 외로운 사투는 아홉 살이 되던 여름에 끝났다. 외갓집에서 집으로 출발할 시간이 되면, 혼자 그 방에 쪼르르 들어가서 시구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나오곤 했다. 바로 다음 해엔 까맣게 잊었다가 액자를 보고서야 퍼뜩 생각이 났고, 그다음 해엔 일기에도 몇 번 적어댄 끝에 마침내 외울 수 있었다.


 방바닥에 앉아 손으로 액자를 가리고선 세로로 한 줄, 한 줄 외워가며 시야를 가린 손을 비켜낸 기억이 난다. 그땐 그게 푸쉬킨이라는 러시아 시인이 쓴 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밭 가는 황소와 함께 그려져 있었으니, 농사일에 지친 이들에게 열심히 농사지으면 결실을 맺을거라고 말해주는 건가 싶었던 거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때도 아니라 이 시가 푸쉬킨의 시라는 사실은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뭐, 러시아에서도 농사지을 때 가축을 쓰기야 하겠지만은 러시아 사람과 누렁소와 밭고랑이라니. 좀 이상한 연결이긴 하잖아?


 할 일이 좀 남아서 외장하드를 챙겨 밤길을 걷는데, 부쩍 차가워진 밤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와서 괜히 허공에 공기를 훅훅 불다가 문득 이 시구가 생각이 났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지니.' 마음은 현재를 놓고 미래를 바라기만 해도 우울할 수 있지만, 미래를 전혀 바라지 않을 때에도 우울할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가 되어버린 걸까. 어쩐지 왜 코뚜레를 뚫은 황소 옆에 이 시구를 적어 놓았는지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은 가을, 아니 겨울밤이다. 바깥에는 첫눈이 내리고, 나는 코가 꿰여 쫓아가는 황소이자 앞서가는 줄 쥔 사람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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