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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냥한주디 Jan 29. 2022

명절 육아는 각자 합시다.

희생은 당연한 게 아니다.

18년 차 며느리의 시어머니 이야기를 보고 많은 분들이 상위 1% 시어머니라 부럽다고 했다.

나도 우리 시어머니를 만나서 참 행복한 며느리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시어머니가 나에게만 1% 시어머니일까?

우리 시어머니는 나에게도 잘해주시지만, 동서에게도 아들, 딸에게도 희생하시는 어머니시다.

그래서 처음엔 그런 시어머니가 안쓰러워 내가 더 도와드려야지 생각했다.


맏며느리이신 시어머니에게는 동서가 둘 있고, 시누이가 둘 있다.

그런데 명절엔 동서들 없이 어머니 혼자 제사음식을 다 하시고, 조부모님 제사 땐 고모님들이 오시지만 그때도 제사음식은 모두 어머니가 다 하신다.


그래서 내가 안 가면 어머니 혼자 하신다는 생각에 나라도 가서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되도록이면 명절과 제사는 참석하려고 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땐 아기띠를 매고 어머님이 제사음식 하는 걸 도와드리기도 하고, 둘째 만삭일 때도 뒤뚱거리며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제가 도와드릴 게 없냐며 어머니의 일을 거들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10년을 넘기며 어머니의 희생이 안쓰럽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지만, 나도 어머니처럼 희생하는 며느리로 살아야 집안이 평온할까? 그게 효도일까? 란 생각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보다 한 살씩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있던 시누이는 친정이 멀다며, 가끔씩 나에게 아이들을 맡겼고,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었다.


처음엔 여동생이 없었던 나는 시누이를 여동생처럼 챙겨주려 했지만, 그땐 내 아이들도 어렸기에 시누이 아이들까지 떠맡아 보는 게 힘에 부쳤다.


그리고, 시누이의 결혼과 두 번의 출산, 아이들 돌잔치, 시누 남편의 부재 등이 있을 때마다 시부모님께서 올라오셨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희생이 필요했다.


어머니께서는 많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나에게 고마워하기도 했지만, 나는 시누이에 대한 미움이 점점 쌓여갔고, 내가 아이들을 봐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누이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몇 년 후 도련님이 결혼을 하고 내 밑으로 동서를 보게 되었고 새로 온 동서와 잘 지내고 싶었다.


동서는 우리 중 유일하게 맞벌이였는데 처음엔 아이를 낳고 바둥거리며 맞벌이하는 동서가 안쓰러웠고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3교대 간호사였던 동서는 명절마다 근무였고 시댁엔 도련님과 아이만 보내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마다 동서의 아이를 보는 건 내 차지였다.


뻔히 내가 아이를 보게 될걸 알면서 문자 한 통 없이 그렇게 아이를 보내는 동서가 얄미웠고, 그동안 시누이가 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결혼 10년 만에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결혼 10년 차가 되던 해 크리스마스이브날 시누이는 신랑과 콘서트를 본다며 나에게 본인 아이 둘을 우리 집 현관문 앞에 떠밀듯 맡기고 갔고, 아이들은 나에게 오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들 4명에게 밥을 해먹이며, 시누의 둘째 딸아이는 기저귀를 늦게떼면서 우리 집 침대에 실수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고 맞이하게 된 설 명절 어머니와 제사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동서가 어머니께 전화를 한 거였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하시던 것처럼 동서에게도 걱정 말고 일하고 오라며, 여기는 아이볼 사람 많으니 할 일 하고 천천히 오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동서는 아이 낳기 전 시누가 나에게 자기 아이들을 맡기고 가는 것에 대해 너무하다며 형님이 지금까지 이렇게 아이들을 다 보고 있었냐며 위로해 주었었는데, 이제는 동서까지 나에게 본인 아이를 맡기며 문자 한 통도 없었다.


나는 그런 동서나 시누가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명절 때 육아는 각자 하자는 말이 뭐가 어렵다고 그 말 한마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나 싶었다.


다음날 제사음식을 다하고 제사를 지낸 후 동서가 시댁으로 왔다.

평소처럼 동서는 형님 고생하셨죠?라고 얘기했는데,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 종일 동서가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하고 있는 게 10년 만에 시댁에서 내가 표현한 첫 번째 불만 표시였다.


그로 인해 시댁의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에게 많이 미안해하셨고, 실망하셨을 것 같다.


동서에게는 그 이후 내가 화가 난 이유와,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땐 미리 나에게 양해를 구해야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얘기를 하고 풀었다.


하지만 시누이에게는 마무 말도 못 했고, 그냥 거리를 두며 만나는 일을 피했다. 이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만나거나 부딪칠 일도 별로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껜 한 번도 시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어머니께서 당연하게 해온 일들을 부당하다고 얘기하기가 죄송했고, 저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어머니께 상처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 안 떨어졌다.




어머니께서는 어머니대에 제사를 없애겠다고 하셨고, 나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도 없으셨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께 감사하다면서도, 어머니처럼 희생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누군가의 희생은 당연한 게 아니다.

명절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다 지나서 한번 해본다.

명절 육아는 각자 합시다.

본인 아이들은 본인이 보세요!




#책과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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