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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영 Jan 16. 2021

다양성만큼 중요한 '안전지대'

[책] 하버드, 미완의 천국을 읽고


미국 대학은 ‘다양성’을 중시한다. 인종, 종교 등 여러 기준에 따른 입학생 비율을 정해놓고 어느 한 가지 특징을 가진 이들이 너무 많이 들어오지 않게 살핀다고 한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라는 미국 사회의 특성상 대학 구성원의 다양성 확보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2019년에는 미국 대학입시 시험인 SAT 점수에 ‘역경 점수’ (Adversity Score)를 포함하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역경 점수란 학생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점수화한 것이다. 부모의 소득 수준, 교육 수준 등 15개 지표로 점수를 매긴다. 이 점수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훌륭하게 극복했거나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준다. 반대 의견에 부딪히는 바람에 실제로 도입되진 못했지만 이러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양성을 중시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성원의 다양성을 지키려는 미국 대학의 노력은 모두가 평등한 출발선에 서 있지 않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됐다. 고소득 부모 밑에서 자랄수록 더 높은 SAT 점수를 얻는 경향성을 깨고 여러 배경의 사람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고루 나눠 가질 수 있도록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 것이다. 또 미국 대학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며 교육받으면 다양한 인종, 계층으로 구성된 실제 사회에서 ‘나와 다른 이’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대학이 구성원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만 힘을 쓴다는 사실이다. 다양성이 불러오는 부작용을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문제는 1995년 미국 일류 대학인 하버드에서 일어난 시네두와 트랑의 살인, 자살 사건으로 드러났다. 하버드 대학은 빈민가에서 자란 사람, 어린 시절 신동이었던 사람 등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이 모여있는 만큼 관리가 더 철저히 이뤄져야 했다. 공부 이외의 세상과 단절된 탓에 인간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있진 않은지, 정신질환이 있진 않은지 살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 내 보건소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정신과 진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학생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생활하는 기숙사 직원들은 학생의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저자가 취재한 결과 예산이 삭감돼 기숙사 직원들에 대한 정신과 관련 연수 계획이 중단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대학 내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안전망은 부족했던 것이다.


에티오피아인 하버드생 시네두도 이러한 문제의 피해자였다. 병적인 우울증을 보였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겪는 문제 정도로만 여겨졌다. 진료도 제때 받을 수 없었다. 항우울제 처방이 필요했지만 약물투여는 이뤄지지 않았다. 또 담당의사가 너무 바빠서 한 달에 한 번이나 보름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었다. 이런 열악한 관리 환경은 시네두가 살인을 저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대학 보건소의 정신과 진료는 "비용이 아주 많이 드는 반면 그 효과를 숫자로 나타내기는 어렵기 때문에" 재정면에서 압박을 받아 왔다고 설명한다. 그녀가 그곳에서 28년간 일하는 동안 진료해야 할 환자 수는 계속 늘어난 반면 의사 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영대학원 효율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학생들의 진료시간은 한 시간에서 30분으로 줄어들었다. "우리는 점점 더 바빠졌어요. 더 적은 수의 의사들이 더 많은 학생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증상이 분명하고 급한 환자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p.213


"외부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드는데 학생들은 그만한 돈이 없지요. 돈이 있다고 해도 병원에 다닐 시간이 없어요. 왜 대학보건소에서 더 치료해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하버드대생이 심각한 정신질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p.215


하버드는 하버드에 합격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하지 않는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버드에는 국제학생의 집이 없어요. 미국 문화에 빨리 동화되는 것을 방해한다는 거죠." 슈구는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모두 그 학생을 여러모로 도와줄 결연 가정이 배정되지만 그것은 명목뿐이라고 했다. "내 결연 가정은 1년 동안 엽서 두 장 보낸 게 전부예요. 하버드는 아주 독선적이고 오만해요. 우리는 지구 상에서 최고의 대학이다, 따라서 너는 분명히 행복하다. 이런 식이죠. 자아의식이 약한 사람이라면 하버드의 그런 태도로 인해 파멸할 수도 있다는 걸 난 알 수 있어요."

- 미완의 천국, 하버드 p.124

 




지금의 하버드는 책 속에 묘사된 하버드보다 더 촘촘한 안전망을 갖췄을 가능성이 크다. 1995년에 일어났던 교내 살인사건을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양한 문화를 녹여내는 용광로인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다양성 확보만큼이나 소외, 배제되는 이들을 위한 안전망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미국 사회가 아닌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 생각해도 의미한 메시지다. 우리나라 대학도 '다양성'의 부작용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외국인 학생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갈등이나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안전망은 충분히 마련해 뒀는지, 국가 지원금을 따내고 대학평가 순위를 올리는 데 급급해 학생들의 정신 건강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과 함께 잘 사는 방안을 고민하는 지혜로운 학생들을 사회로 내보낼 수 있다. 튼튼한 안전지대 만들기. 다양성 확보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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