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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트 Mar 23. 2023

끌어당김의 법칙을 대하는 태도

요즘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가득 차있다.

국내에는 2007년 '시크릿'으로 알려진 개념으로, 쉽게 말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에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개념은 유사과학으로 여겨진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10대의 나는 모든 것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고, 회의적이었다. 

종교에 대해 그러했고 정치에 대해 그러했고 사랑에 대해 그러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조던 피터슨' 교수의 성서 강의를 접한 뒤였다.

https://youtu.be/f-wWBGo6a2w

해당 강의는 구약성서를 심리학, 뇌과학적인 측면으로 해석하는 강의로, 

이를테면, 창세기는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우화로 풀어낸 것이라는 참신한 견해를 이야기한다.

성경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 보니 이와 같은 해석이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2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적히고 다듬어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담은 책.

종교적 교리는 배제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구절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어떠한 목적'에 의해 남아 있는 것이다.


어쨌든 피터슨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난 후 기독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왜 종교를, 특히 기독교를 기피했는가?'



편견에 대해


편견은 보통 어떤 것에 대한 첫 경험(간접이던 직접이던)이 좌우한다. 그리고 속한 사회도 큰 영향을 끼친다. 

나의 경우 교회에 갈 때마다 좋지 않은 경험을 했고, 주변의 교인들로 인한 경험들도 그러했다.

그렇게 생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모든 정보에 대한 필터가 되었다.

특정 종교인이나 교회의 부정을 적은 기사, 극단적 사례, 악영향 등만 인식하게 된 것이다. 

편견이 생긴 이후엔 그 '계기'는 잊고 '가치관'만 남게 된다. 


(편견은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쓰이지만 인류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편견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가치판단을 매번 직접 경험해야만 내릴 수 있고, 이는 매우 비효율적일뿐더러 때론 생명의 위협을 동반하기도 할 것이다.)


 편견이 생긴 이유를 되짚어 보고 나니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고개조 


내가 끌어당김의 법칙 이야기를 하다 왜 기독교 이야기를 꺼냈는지 의아할 것이다.

왜냐면 그 두 가지가 나의 대표적인 '편견'이었고, 

그 편견을 부수는 과정이 인식의 상당한 변화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안 좋은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범죄를 저지른 사제가 있다. 그는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부정한 이익을 취했다. 이런 인간이 사제가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A 무슨 직업을 가지던, 그것에 어울리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것이다.


Q 교회에 과몰입되어 일상마저 내던진 교인이 있다. 가족보다 교회, 본인 삶보다 교회라는 이 사람이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A 사기 피해자가 되어있거나, 다른 종교(심하면 사이비)에 빠져있거나, 정신병동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위의 문답은, 개인의 행위와 집단을 분리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개인주의자라 자칭하면서도 이런 사고방식이 낯설었다.


모든 인류사에서 종교는 사회안정의 필수 요소였다. 어쩌면 지하철에 보이는 이상한 교인들은 교회가 없었다면 병원이나 교도소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대한민국에는 이상한 교회가 많고 이상한 교인도 많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에서 믿어야 하는 존재는 교회와 사제가 아니므로.

(따라서 나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내게 기독교와 교회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원불변한 진리는 없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현대까지 '검증이 완료된 가설'이다. 이는 기술 발달과 연구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게다가 현대과학으로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한 '의식'이라던가 '정신'에 대한 지식은 오죽하겠는가.


'기적'이라 불려 온 것들이 현대 과학으로 밝혀내지 못한 물리 현상이라면 어떨까?

'열반'이나 '천국'이 인간 의식의 '특정한 상태'라면 어떨까?

이 우주는 우리가 '신'이라 여기는 존재가 만든 시뮬레이션 속이고 물리법칙은 코드라면 어떨까?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없고 모두 동시에 존재하며, 인과가 없다면 어떨까?

어떤 상상을 해도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사고개조의 결과를 한 줄로 정리하자면, 

'믿어 나쁠 것 없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



그럼 이제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너무 함축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목표를 달성하고자 할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현재> -------------(사건/행위/결정)------------- <목표>


현 상황에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건, 어떤 행위를 하건, 어떤 결정 이후에 목표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당신이 100억 부자 되기라는 목표를 세웠다고 가정하면, (사건)은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건, 투자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가능성의 세계


현재에서 목표로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아무리 조사를 해도 정말 중요한 계기는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다.


100억 부자가 되기 직전,

어느 날 연예인이 이용한다는 것으로 바이럴이 되어 폭발적으로 성장을 할 수도 있고,

온라인으로 확장한 것이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쇼룸, 팝업 행사, SNS 마케팅이 성공적일 수도 있고,

꾸준히 매장을 열다 어느 날 기업에 매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 앞서 벌어진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유튜브 채널을 구독했거나,

인스타그램 광고가 눈에 띄었거나,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거나,

다니던 직장에서 한 소리 들었거나, 

커피 잔이 깨진 것일 수도 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 중 어떤 것이 목표로 이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고통스러운 실패 경험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선행조건이라면 우리는 실패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원한다는 것


'원한다'는 목표를 향하는 나침반이 되어준다. 단순히 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감정으로도 갈망하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오로지 그것을 이루는 방향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우리는 눈에 들어온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시각피질에서 일종의 필터링을 거친 후, 보정/가공된 영상을 인식한다. (시각피질이 손상된 환자는 눈이 멀쩡함에도 보지 못한다.)

이는 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극에 작동하는 것으로,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고 한다.

간절히 원하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향으로 세상을 '선택적 지각' 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이 작동하는 것이다.


나의 언어로 정의한 끌어당김의 법칙은 이렇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가운데, 목표로 이어진 것을 선택적 지각하는 것.'





최근에 내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는 일을 자주 겪었다. 그중 대부분은 주변에 직접 말을 통해 선언한 것들이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하는 것은 지키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주관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면 요 근래의 일들은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상황'에 더 가깝다.


목표를 이루어지는 과정을 쪼개보니 언제나 기회는 예측 바깥에서 찾아왔다.

사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한 명의 개인이 인지할 수 있는 변수와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우리의 목표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없는 윗 계단에 존재하니 말이다.


그리고 놀랍도록 그 기회는 내가 '변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리고 그 미래를 '갈망' 할 때야 비로소 찾아왔다.

그 갈망은 불안도, 망설임도, 걱정도 없는 갈망이다.

오로지 그게 필요하다는 감정적인, 무의식적인 레벨의 갈망.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이지만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아가 있고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인식한다.


만약 모든 가능성과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즉, 그들의 인식 자체가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은 그들의 능력을 미약하게나마 물려받은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차원을 아득히 넘어서는 정보량이므로 의식 너머에서만 작동한다.

우리의 시간관념과 상상력은 그 능력이 의식차원에서 발현되는 현상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인과를 역전하고,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학계를 보며

자연스레 인간의 인식에서도 이런 것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세계는 모두 프렉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에 말했듯, 믿어도 손해 볼 게 없다.

스스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으며 행동하는 것에 어떠한 부정적인 작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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