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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body Sep 08. 2019

아빠와 와인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십 대 초였고 초등학생이었다. 서양문화에 관심이 많고 새로운 맛을 즐기셨던 아빠가 어느 날 술을 한 병 사 오셨다. 초록색 병에 든 술 이름은 마주앙이었고 저녁상에 반주로 올라왔다. 아빠는 보수적이고 엄하셨지만 의식주에서는 진보의 첨단을 달리셨다. 아침식사로는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를 드셨고 저녁밥을 먹던 나에게 마주앙 모젤을 맛 보여 주셨다. 풍미나 향 따위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약간 새콤달콤한 맛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금단의 열매를 얻어먹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마주앙 모젤, 이거 잘 만들었네!"라며 한 잔 더 따르시는 아빠의 추임새 때문이었는지 짜릿한 그 순간은 영원히 기역 속에 저장되었다.


우리나라에 와인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와인 마시는 유행이 번지면서 그 옛날의 마주앙은 제대로 된 와인이 없을 때 마시던 한물 간 촌스러운 술로 치부되었다. 이제 아무도 건빵을 별미 간식으로 여기거나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와인 좀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마주앙은 농담거리로 전락했다. 모젤 와인이 흔하지도 않고 독일 와인 자체가 별로 인기가 없다 보니 흘러간 노래처럼 와인 매장에서 페이드 아웃된 것 같다.


마흔 다 돼 와인을 즐기게 되면서 나는 리슬링이라는 청포도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고도 몇 년 지난 다음, 어릴 때 맛봤던 마주앙 모젤이 리슬링 위주로 만든 와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 들고 오셨던 그 술 아닌가?


요즘 독일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와인 산지는 아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이제는 미국, 호주, 생산량으로는 중국에도 밀린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진하고 드라이한 레드 와인이 대세였기 때문에 엘프처럼 가볍고 투명한 느낌의 독일 와인은 비주류로 밀려났다. 사람들이 앤젤리나 졸리나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미인이라고 하지만, 옛날 배우 그레이스 켈리 역시 미인이었던 것처럼 독일 와인도 알고 보면 맛있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닐 뿐.


와인이 다 그렇지만 생산지에 가서 마시면 훨씬 맛있다. 공기가 다른지, 음식이 딱 어울려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와인도 여행하면 피로가 쌓여 맛이 좀 떨어지니 쉬게 해 준 다음에 마시라는 말도 있어서 외국에서 공수한 와인을 며칠 보관한 다음에

마신다. 아무튼 현지에서 마시는 와인이 마시기 더 좋은 상태이며 특히 와이너리에서 마시면 더욱 맛있다.


어릴 적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들고 와서 맛 보여 주신 마주앙의 고향인 모젤을 찾아갈 것이다. 아빠가 남겨주신 와인의 추억보다 더 강렬하고 향기로운 기억을 담아올 것이다. 가자. 리슬링이 익는 모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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