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형 단편 연재소설
남편과 아이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쵸코 산타 케이크를 받아 든 아이는 무척이나 행복해했고, 축하 촛불을 후 불어 끄는 순간에도
“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캐럴을 부르며 멈추지 않았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케이크를 먹으며 남편이 물었다.
“ 타이어 펑크 나서 추위에 고생했을 텐데 기분이 많이 좋아 보이네? 어떻게 고쳤어? ”
“ 주차장에서 내 차 상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사람이 고쳐줬어. 보스턴에서 3D 전공한 박사고, 에트리에서 근무한대. 나처럼 케이크를 사러 왔었다고 하더라고. 아직 미혼인데 식사 대신 케이크를 먹는대. 케이크가 좋아서. 운전하면서 펑크 난 것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는 게 자랑이냐며 면박을 주더라고. 고마워서 그림을 드리겠다고 했더니, 막 뛰어 가더라고. 참 고맙고 신선했어. ”
“ 볼링 치러 온 사람이었나? ”
“ 아니. 케이크 사러 온 사람이라니까.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했어.”
“ 뭐... 하여튼 잘 고쳤다니 다행이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양난 꽃은 내 방에 조용히 꽂았다. 그리고 그 꽃에서 며칠 동안 레몬향이 났다. 레몬 향은 며칠 동안 약간의 설렘과 함께 하루 종일 내 코끝을 따라다녔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새벽에 눈을 떠도 피곤하지 않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발딱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고, 여유롭게 음악을 틀고 모닝커피를 한잔 마시며 조간신문도 읽었다. 하루하루가 레몬향기와 더불어 기적같이 즐거워졌다.
단순히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서 따뜻함을 느낀 것만으로 즐거워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유 없이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롯데호텔도 정겨워졌고, 빵도 더 자주 사러 가게 되었다. 며칠 만에 우리 집 아침식사는 곡물 빵들로 대체되었고, 저녁 후식으로 케이크를 먹었다.
그날 저녁도 퇴근 후 회식이 있다는 남편을 대신하여 시댁에서 아이를 데려와 간단하게 저녁을 차렸다. 물론 전 날 먹다 남은 케이크를 후식으로 먹었다. 그때 TV를 보던 아이가 8시 뉴스 메인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 엄마! 아침에 아빠랑 할머니네 집 가면서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롯데호텔에서 범인 잡았대. ”
“ 응? 무슨 범인? 무슨 사건 있었대?”
“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바퀴를 못으로 찌르고 돈을 받았대.”
“ 응? 뭐라고? 일부러 자동차 바퀴를 못으로 찔렀단 말이야? 내 차도 그 범인이 그런 거 아냐? 엄마 도와준 분 아니었으면 엄마도 큰 일 날 뻔했어!”
“ 바바리코트를 입고 친절하게 생겼대. 그래서 사람들이 호텔에 들어가면 못으로 바퀴를 찌르고 사람들이 나올 때 도와주면서 돈을 받았대. ”
“ 응? 뭐라고?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 아빠 차 안에서 라디오에서 나왔다니까? ”
“ 정말 버버리 코트 입었대? ”
“ 응.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도 큰 일 날 뻔했대. 재수가 좋아서 엄마는 괜찮았던 거래.”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레몬향을 풍기며 우수에 젖은 얼굴로 내게 차갑지만 다정한 친절을 베풀었던 그가 범죄인 일리 없었다.
날마다 케이크로 식사를 하고 에트리 3D박사에, 보스턴에서 유학을 한 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난을 좋아하고, 내가 산 양난 꽃에 감동하던 그가 그런 자잘한 범죄인 일리 없었다.
말씨나 태도도 너무나 교양 있고 이지적이지 않았나? 물론 사람은 양면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 표정이 좀 어둡고 그늘져 있었던 점이 이상했었다. 왜 이미 가진 것도 많아 보이는 사람이 저토록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나? 그러나 그토록 친절하던 사람이 뉴스에 나온 범죄인 일리 만무했다.
아이의 말을 뒤로하고 신문을 찾아 사회면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몇 줄 되지 않는 단신 기사로 롯데호텔 상습 자동차 펑크 범인 기사가 나와 있었다. 버버리 코트를 입고 젠틀한 이미지로 지속적인 사기행각을 벌여왔다는 기사가 눈 속에 박혀왔다.
아! 어쩌면..... 그랬을지도..... 펑크 난 내 차를 보고 달려온 것도 사실 좀 이상했고, 과감하게 내 차를 막아선 것도 좀 이상했다. 보통 일반 사람들이 그 정도로 몸을 던져서 다른 사람을 구해줄 수 있을까? 나는 어떨까? 나는?... 나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범인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내 차의 바퀴를 찌른 것은 다른 버버리의 범인이고, 나를 위급 상황에서 구하기 위해 달려 나온 버버리는 또 다른 젠틀맨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마음속에 한 줄기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갑자기 코 끝에 머물던 레몬향도 날아가고, 양난도 시들해 보였으며 먹다 남은 케이크는 쳐다보기도 싫어져 음식물 쓰레기통에 쳐 넣었다. 그리고 갑자기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침엔 추위 때문에 일어나기 싫어 이불속을 팠다. 그리고 추위를 이기기 위해 식탁엔 곡물 빵 대신 뚝배기에서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김치찌개가 준비되었다. 더 이상 저녁 후식을 위해 케이크를 사러 가지도 않았다.
신문기사를 확인한 며칠 뒤 감기몸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자동차 펑크 수리하는 동안 차가운 눈을 맞으며
장시간 밖에 있었던 탓인 듯했다. 어쩔 수 없이 퇴근길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롯데호텔 사우나를 찾았다. 땀을 빼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몸살 기운이 좀 사라질 듯싶어서였다.
1층 로비의 빵가게를 휙 지나 사우나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갑자기 레몬향기가 밀려들어왔다.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텅 빈 그곳.
다시 그날의 따뜻한 기억과 신문기사의 불쾌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1층!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생각에 빠진채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3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이 막힐 뻔했다. 레몬향 비누 향기가 그득한 엘리베이터! 아마도 이 향기의 주인은 바로 전 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것이 분명하다.
앗! 내가 생각에 빠져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서있던 그 때 버버리 자락이 휙 지나갔던 기억이.. 이미지가.... 뭔가 멈칫했던 느낌이 있었지만 나는 생각에 깊이 잠겨 기계적으로 3층 버튼을 누르고 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다시 1층 버튼을 누르고 내려갔다.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린 문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현관문을 급하게 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멀리 호텔 정문을 빠져나가는 차 한 대가 들어왔다. 그였을까? 그가 정말 범인이었을까?
세상에 버버리를 걸친 남자는 수 천 만명이다. 그러나 그중 그는 누구였을까? 범인은? 또 젠틀한 그는? 답은 찾을 수 없다. 아니 찾고싶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타이어에 펑크가 났던 크리스마스이브 날 내린 눈은 너무도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