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7일 일요일. '한 뭉치'
글을 쓰려면 몸과 정신을 모두 말짱하게 깨워야 한다.
새벽 108배 기도를 마친 후 도반들과 산책로로 이동했다.
빠르게 걸으며 바디 파워를 업 시킨 뒤
냇가 돌다리 위에 앉아 고요히 명상하는 시간이 즐겁다.
영감이 몰아쳐서 미친 듯이 써대는 글이 아니라
일종의 교육자로서의 소명의식에 의해 쓰는 글이다 보니
숨이 턱턱 막히며 차오를 때도 많다.
누군가 소명에 의해 살지 말라는 말을 했다.
즐거움으로 살고 즐거움으로 일하라는 말이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글쓰기에 집중하면 좀 가벼워진다.
아주 멋진 글로 인정받겠다거나, 베스트셀러를 만들겠다는 바람을 버리고 다만 내가 이 세상에 잘 쓰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하나의 삶의 기획으로 제안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쉽고 재미있어진다. 그러나 너무 다양하게 많은 것들을 디테일하게 담으려고 하다 보니 머릿속이 더 무겁고 일의 진척은 더 느리다.
아마도 난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일 거다.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한 뭉치, 이것으로 능력을 인정받겠다는 생각도 한 뭉치, 책을 얼른 내서 짱 하고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도 한 뭉치, 아무도 못한 일을 내가 먼저 최초로 했다는 흔적에 대한 욕망도 한 뭉치, 남들이 못하는 일을 나는 한다는 교만도 한 뭉치.... 이러다 보니 늘 너무 무겁다.
나는 언제쯤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 벼처럼 성숙해질 수 있을까?
지장보살은 인과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중생을 구제할 목표만 생각하며 지옥에 뛰어들기에 지옥이 지옥이 아니라는 법륜 스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인과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쓰기에 뛰어들었기에 매일매일 나를 스스로 가두고 고문하는 지옥에 갇혀있는 것이구나. 내가 먼저 행복하지 않은데, 어찌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교육기획을 할 수 있을까? 언어의 방어적인 태도와 뉘앙스도 내 무의식에서부터 발현한다.
난 처음부터 사랑받는 존재였고 지금도 사랑받는 존재다. 난 열등하지 않고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피해망상적 방어기제를 쓴다. 강한 듯 잘난 척하고 교만한 마음과 언어로 자신과 타자를 동시에 상처를 주면서 스스로는 다시 피해망상에 빠져 허약한 실체로 살아간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문제점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나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내 아이디어는 이런 것인데, 한번 들어보실래요?라는 맥락으로 겸손한 태도로 써가는 것이 읽기에도 편안하다. 그러나 대체로 나는 내 주장을 상대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그리고 나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더욱 강한 어조의 글을 쓴다.
작가가 격한 감정 속에서 쓴 글들은 독자들에게도 똑 같이 전해지며 독서 내내 불편함을 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글을 쓰며 허약한 실체를 드러내고 만다. 글이란 어쩌면 그토록 정직한 것이다.
오랜만에 언니 가족들과 커피를 마시고 나는 카페에 남아 5시간 동안 원고를 수정했다.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다 다시 새벽에 걸었던 산책길로 갔다.
고요하지만 풍요롭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차분히 내려앉으니
글쓰기도 말처럼 친절하고 부드럽고 겸손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찾아든다.
영감의 순간은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 순간 그대로 충분히 충만하고 더할 나위 없는 존재로 변형됨을 느낀다.
삶의 풍요와 사랑과 행복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와 내 존재 자체가 된다.
바랄 것 없는 상태,
나는 문득 지장보살의 바랄 것 없는 지옥에서의 수행과 보살행에 대해 알 듯해진다.
그리곤 어깨를 누르던 무엇인가가 한 뭉치 떨어져 나간 듯 가볍다.
나는 문득 자신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을 건넨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샤워하고 쉴까?”
부드럽고 겸손한 나의 말에 나는 다시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오르며 나에게 다시 속삭인다.
" 너 정말 사랑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