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사랑한다.
지난 글에서 질 좋은 인풋을 위한 궁극의 도구로, 관찰 스케치를 소개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관찰 스케치를 그리는 과정에 대해 소개해 볼까 합니다. 관찰하고, 이해하고, 스케치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는 대상과 친밀한 관계가 되는데요.
알면 사랑한다.
라는 말처럼(생물학자 최재천) 어떤 것을 잘 이해하고 깊이 알게 되면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틉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찰 스케치는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씩 늘려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다 보면 알게 되거든요. 그 사물의 요모조모를.
사랑하는 사물이 있나요?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이 잘 가지 않는 사물이 있나요?
그려봅시다.
그리다 보면 아끼는 마음이 쑥쑥 자라날 거예요.
저는 의자를 꾸준히 그려나갈 생각인데요.
의자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아직 많이 모르고, 덜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자, 그럼 그려 볼까요~:)
● step1. 관찰할 대상을 준비합니다.
Go chair / Ross Lovegrove / 1998-2001
이번에 그려본 의자는 로스 러브그로브의 고체어인데요. 평소에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 서먹했거든요. 친해져 보려고 선택했습니다. 관찰 스케치는 실제 대상을 보고 그려도 좋고,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를 관찰하면서 그리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Chair Anatomy라는 책을 보면서 스케치를 진행했습니다.
의자 해부학?
멀쩡하게 서있는 의자들만 봐왔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의자의 팔과 다리, 등판, 좌판이 낱낱이 흩어져 있어서, 의자의 뼈대와 관절, 근육까지 모두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거든요. 일반적인 의자 디자인 관련 책은 의자의 '겉'에만 집중되어 있어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요. 이 책은 의자의 '겉'과 ' 속'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어, 의자 디자인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디자이너의 찐 아이디어는 겉보다 속에.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겉만 보지 말고, 속도 들여다봅시다.
● step 2. 도구를 준비합니다.
관찰을 위한 눈과 마음을 준비하고, 그리기 도구도 준비합니다. 저는 최근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요. 간단하게 펼쳐서 그릴 수 있고, 무엇보다 수정과 편집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단점이라면, 아날로그 도구로 돌아갔을 때, 왼손이 계속 헛손질( command + z)을 해대는 것인데요. 부끄러워하는 왼손에게 조용히 지우개를 쥐여주며 말합니다.
" 여기서 이러면 안 돼... 그런다고 지워지지 않아..."
몸의 기억이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일필휘지의 꿈은 멀어져 가지만, 디지털 도구가 지금의 저에게는 가장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도구네요. 각자의 상황과 취향에 맞는 도구를 선택해 보아요.
● step 3. 사물의 겉모습을 그립니다.
사물의 겉모습을 잘 관찰하고, 조형적인 특징을 파악합니다. Go 체어는 우아한 선들이 유기적인 형태감을 만들어내고 있네요. 우아한 선. 자유로운 선으로 크게 크게 그립니다. 대략적인 형태가 그려졌다면, 이번에는 단단한 선으로 형태를 정확하게 표현해 봅니다.
모사할 때는 거장의 손을 실제로 경험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 멘토 버트 도드슨의 <드로잉 수업>'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인데요, 멋지지 않나요? 거장의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면 거장의 작업 방식이나 손의 움직임, 감정까지 경험하게 된다는 말인데요. '사물의 형태를 따라 그리다 보면 디자이너의 조형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라고 바꿔 읽을 수 있겠네요. 이렇게 디자이너가 빚어 놓은 아름다운 형태를 따라 그리면서, 나의 조형 감각을 키워봅니다. 참 매력적인 공부 방법이죠?
● step 4. 사물의 속을 들여다봅니다.
디자인 감각을 훈련했으니, 구조 공부도 해봅니다. 겉모습을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 속에는 무엇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나의 예상과 일치하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과정이 꽤 재미있습니다. 눈으로 대강 훑어보았지만, 그리다 보면 미쳐 보지 못하고 놓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요. '보고 있어도 보고 있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Go 체어는 파츠의 결합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웠는데요. 겉으로 보이는 우아함과는 전혀 다른, 복잡한 디테일이 숨어 있었습니다. 내부 구조와 디테일을 읽어가면서 디자이너의 똑똑한 두뇌를 경험합니다. 이 단계의 스케치는 형태보다 구조 자체에 집중하면서 그립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닌, 구조를 이해하는 것!
● step 5. 관련 정보를 모아 공부합니다.
스케치가 끝났으니, 이제는 노트를 펼쳐 공부합니다. 책의 내용을 읽어 보고, 모르는 부분은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모읍니다. Go 체어는 마그네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의자라고 하네요. 마그네슘이라는 재료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모르는 것 천지네요.
관찰 스케치 안에 넣을 내용들을 추려 정리해놓고요. 다음 단계는 화면 구성! 그려놓은 스케치들을 정리 정돈해 줍니다.
● step 6. 화면에 질서를 만들어 줍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이미지의 사이즈와 배치에 신경 쓰면서 요리조리 바꿔봅니다.
Go 체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앞다리와 시트 프레임, 그리고 등받이 프레임을 한 번에 결합하는 부분이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화면의 중앙에 배치시키고, 색을 넣어 연결 관계를 좀 더 쉽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아래 그림은 화면 구성 전인데요. ↓ 어떤가요? 화면 구성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가 확 되죠? 이렇게 정보의 흐름을 만들어주면 나의 이야기를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구성이라는 작업, 참 재미있지요오~?
● step 7. 텍스트를 넣어 정보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이미지의 구성을 마쳤으니, 마지막으로 텍스트를 넣어주어야겠네요. 관찰 대상에 대한 정보와,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적어 넣습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어떻게 연결해 줄지를 고민하면서요. 저는 선과 화살표를 자주 그려 넣는데요, 그림에 활기가 생겨서 좋아해요. 으쌰 으쌰. 정보를 실어 나르는 저 선들을 보세요. :)
Go 체어를 스케치하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배우게 되었네요. 6가지로 정리해서 그림 안에 적어 넣었습니다.
글을 써넣으니 그림만 있을 때보다 확실히 더 재미있네요. 와글와글 할 말이 많아 보입니다.
좀 정신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다음 관찰 스케치는 이 부분을 좀 더 신경 써서 만들어 보려고요.
오늘의 완벽은 내일의 부담으로 다가오기에.
오늘의 빈틈을 사랑합니다. :)
이렇게 완성했습니다.
글이 꽤 길어졌네요.
혼자만 와있는 듯한 싸한 기운이 돌지만...
⊙⊙ 관찰 스케치 그리는 과정 정리해 볼게요.
1 스케치할 대상을 정한다.
2 도구를 준비한다.
3 겉모습을 관찰하고, 그대로 그려본다.
4 속을 들여다보고, 구조를 이해하며 그린다.
5 정보를 모으고 공부한다.
6 이미지(스케치)로 화면을 구성한다.
7 텍스트(공부한 내용)를 넣어 화면을 완성한다.
관찰 스케치. 호흡이 긴~작업이네요.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고요.
Go chair와도 이제 친해졌습니다.
길에서 만나면 엄청 반가울 거 같아요.
알면 사랑한다.
그리면 더 사랑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의자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