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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年 1月 11日, 서울

오래된 메모

by memo

필름을 맡기고 근처 미술관을 들렀다. 미술관 뒷길에 있는 사진관 덕에 웬만한 전시는 놓치지 않고 보게 된다. 이제 출구 같은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익숙하게 다닐 수 있다. 근처에 맛있는 빵집부터 카페, 마켓이 열리는 곳까지 이 주변은 전부 꿰고 있을 정도다. 근처에 사는 친구와 만난다면 광화문, 종로까지도 쉽게 걸어갈 수 있으니 사진관 가는 날은 몇 개의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는 뿌듯한 느낌을 준다. 수 없이 지나 온 풍경들이니 여기선 어디라도 충분히 갈 수 있다. 이런 순간에야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 몇 살인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방학 때, 서울에 놀러 가는 건 1년 치 소원 리스트 중 하나였다. 엄마는 오빠와 나까지 둘을 서울에 보내는 게 어쩐지 미안한 눈치였지만 크리스마스 소원과 맞바꿀 정도로 서울은 어느 때든 가고 싶은 곳이었다. 서울, 서울 노래를 하던 나는 여수에서 제일 유행하는 옷으로. 또래 아이들에게 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남 모를 다짐을 하곤 했다.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방학 때마다 들른 서울은 내 키만큼 쑥쑥 자라는 기분이었다. 매번 들리는 곳이었지만 번번이 떨리는 이유는 뭐였을까. 서울 톨게이트에 다다른 순간부터 도착 안내를 듣지 않아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10층, 24층… 여수에는 좀처럼 없는 높이의 건물을 손으로 다 세보기도 전에 지나치고 말았다. 그 높이에 기가 죽긴 했지만 그것이 내겐 서울의 인상이었고, 여수에 돌아가면 항상 그 건물들이 아른거렸다. 1층을 크게 그리면 스케치북에 담아지지도 않는 무서운 높이. 그곳 안에서 사는 것이 내 꿈이 되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돼.

하지만 서울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 꽤 많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4학년 때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은 후로 이모는 밖을 나갈 때마다 두 팔을 붙들고 말했다. 밖에 나가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때 놀이공원에서 엉엉 소릴 내며 서럽게 울지만 않았어도. 경찰서를 찾아가 도봉구만 외치며 살려 달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서울을 가로지르며 다녔을 텐데. 5학년이나 된 소녀에게 가만히 있으란 이야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서울은 정말 그런 곳이었다. 잠깐 오빠의 손을 놓치면 만날 수 없는 곳. 아무도 내 눈물에 이유를 묻지 않는 곳.


1999年 1月 11日, 맑음



작은 이모가 사는 서울. 미도파 백화점이 여수 아파트만큼 커 보이던 곳. 어느덧 이곳에 산 지 20년이 다 돼 간다. 어엿한 망원동 주민이 되었다. 그땐 하늘에 닿을 것처럼 치솟은 건물 사이를 헤매지 않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정말 그런 날이 올까. 그렇게 치자면 꿈을 이룬 거나 다름없다. 이 복잡한 도심을 쏙쏙 야무지게도 잘 찾아다니고 있으니. 이렇게 큰 서울 땅도 어느 지점에선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진리까지 깨우쳐버렸다.

오늘은 서울 광장을 가로질러 을지로까지. 저녁엔 극장에 가서 연극도 한 편 보고 돌아올 수 있다. 환승도 잘 하고 271 버스를 타고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돌아온다. 정말 어른이 된 것 같다. 오늘은 어린 날의 나에게 이 하루를 자랑하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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