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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16. 2019

일식집을 둘러싼 수수께끼 아리마스

일식을 남들만큼은 좋아해서 라멘이나 돈부리를 먹자는 제안이 나오면 반대하는 일이 없는데, 음식의 맛과는 별개로 상당수의 일식집이 공유하는 ‘코드’만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일식집의 ‘코드’라면 무엇이 있는가? 일단 첫 번째는 나무를 사용해서 직선이 강조된 인테리어를 해두는 것이다. 이건 여기저기 보다 보면 식상하기 짝이 없지만, 음식점이나 술집이 요즘 화제가 되는 카페들처럼 기상천외한 인테리어로 꾸밀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려니 한다. 문제는 두 번째부터다.


두 번째 코드는 누구나 짐작하듯이 ‘액션 피규어’ 장식이다. 어찌된 일인지 서울에서 대중적인 일식집을 돌아다니면 곳곳에 액션 피규어를 자랑스럽게 세워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90퍼센트는 원피스 피규어다. 언제부터 이런 풍조가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원피스 피규어가 없으면 여기는 뭔가 다르다는 기대감마저 생길 지경이다.


물론 음식점에 피규어를 놔서 나쁠 것은 없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런 인테리어를 시작한 사람은 정말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일본 문화에 대해 잘 아는 집이라는 어필을 하기 위해 궁리를 거듭한 끝에 마네키네코를 초월한 뭔가로 액션 피규어를 선택한 것이리라. 그리고 가게에 놓는 것이니 오타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미소녀 피규어가 아니라 가장 대중적(혹은 그렇게 여겨지는)이면서도 캐릭터가 다채롭고 특징이 강한 원피스를 고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원피스 피규어가 몇몇 가게의 특징이 아니라 일식집의 기본 인테리어 비슷한 풍조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저 집에는 원피스 피규어를 놨으니 우리는 아이돌 마스터…… 아니, 지브리로 가자!’ 하는 식으로 좀 다변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영업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가장 안전한 길을 따라가는 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원피스 피규어를 놔서 매출이 대폭 올랐다거나 미소녀 피규어를 놔서 손님의 발이 끊겼다는 통계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닐 테니 그 정도는 주인장 취향 따라 다양하게 시도해도 되지 않으려나…….


그래서 나는 원피스 피규어를 놓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거나, 혹은 그게 가장 합리적인 지출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가령 본사에서 이걸 놓으라고 영업 지침으로 정해두고 원피스 피규어를 보내면 원피스 때문에 헛된 꿈을 품고 항해에 나섰다가 패가망신한 사람이라도 울며 겨자먹기로 원피스 피규어를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진품이든 가품이든 원피스 피규어를 저렴하게 대량으로 구입해서 일식집에 전문적으로 판매하거나 대여하는 업체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경우라면 피규어를 놓긴 놔야겠는데 원피스가 제일 저렴하니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선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아무튼 납득할 수 있는 사정이 있긴 하겠지. 다만 그렇게 자리잡은 작품이 하필 내가 보지 않는 작품이라는 건 영 달갑지 않다.


여담인데, 예전에 다니던 대학교 인근 음식점 중에 정말 근사한, 값으로 따지면 분명 수십만 원은 호가할 피규어들을 진열장에 넣어서 제대로 전시한 집이 있었다. 크게는 높이 20센티미터는 될 법한 것들로, 작품도 마블 계통부터 이것저것 다양했다. 언제 한 번 일행과 물어보니 주인장이 취미로 수집한 것이라고. 이런 것은 확실히 멋지고 호감이 간다. 중식집이라 아주 잘 어울리진 않았지만…….


일본식 인테리어 법칙은 모르겠지만 일단 원피스 피규어를 치우면 더 일본적이긴 할 것이다. 호돌이 꿈돌이를 놓는다고 한국적인 인테리어가 되진 않으니


세 번째 코드는 다름아닌 '일본어 호객’이다. 손님이 들어오면 “이랏샤이마세!” 하고 힘차게 인사하고, 점원이 주문을 받아 전달하면 “돈코츠 하나 아리마스!”하는 식으로 복창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좀 줄어들긴 했지만, 일식 요리점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할 때는 이런 가게도 많고 일본어의 비중도 높았다.


이것도 아마 본격적인 일식집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일 테지만,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식 표현을 자연스러운 한국식 표현으로 바꾸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입장에선 여간 혼란스럽지 않다. 일본어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은 재미있게 즐기려나? 하지만 중국 음식점이나 프랑스 음식점에서 ‘니하오마’ ‘봉쥬르’하고 접객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지 않나 싶다. 점원끼리 나누는 대화는 손님도 명쾌히 알아들을 수 있는 편이 나을 테고, 반대로 일본에서 한식집에 갔는데 점원들이 “김치치게 히토쓰 있습니다!” 한다고 생각하면 100퍼센트 재미있지만도 않을 것 같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홍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주변에서 젊은이들이 담배를 피우며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는데, 다들 근처 일식집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점원들 같았다. 그런데 내용이 대강 이런 것이었다.

“그래? 너희는 주문 받는 것까지 일본어야? 우린 인사만 하는데.”

“그거 뭐였지? 무슨 아리마스?”

“어어, 히토츠 아리마스.”

“아, 나 아직 기억을 못해가지고…….”

현장의 점원들도 익숙하지 않은 말을 익혀서 접객하느라 이래저래 고생이 많은 모양이다. 그나마 어순이 같아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어순이 달랐다면 이런 시도도 하지 않았으리라. 


모처에서 먹은 카레. 익힌 브로콜리가 이렇게 맛있는줄 몰랐다.


한편, 예전에 합정 쪽에서 가본 일본 카레 전문점은 무척 작고 ‘우리가 이렇게 일본적이다!’ 하는 자기 주장도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작은 점포를 깔끔하게 꾸려놨다는 점에서 본토의 맛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카만 식기에 담겨 나온 홋카이도식 카레도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라 무척 마음에 들었고, 실제로 맛있기도 했다. 기왕이면 이런 집이 많아지면 좋겠는데…… 이것도 남들과 다른 걸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는 겉멋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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