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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02. 2016

20세기에는 화상 전화가 이렇게 쓸모없을 줄 몰랐지

80~90년대에 예측한 근미래의 생활상을 지금 다시 보면 꽤 재미있다. 그때 터무니없다고까지 느껴진 미래 기술이 지금 와서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지고 다니는 개인용 초소형 통신 기기는 이미 한참 유행이 지나서 초소형을 집어치우고 대형화되고 있고, 노트북도 1킬로그램 밑으로 내려가 노트북 하나 가져간다고 커다란 노트북 가방을 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1995년작인 영화 “코드명 J”는 뇌에 삽입한 칩에 160기가를 저장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텍스트만 저장한다고 치면 160기가는 어마어마한 용량이 틀림없지만, 요즘 데이터를 저장하자고 뇌를 개조한다면 기왕 하는 거 몇 테라 옵션을 고를 것이다. 1968년 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한 태블릿 기기는 아이패드가 대중화시켜 이제 보기 드물지도 않다. 자동차를 부를 수 있는 전자시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스마트워치는 이미 나온 데다가 무인 자동차도 한창 개발 중이니 기술적으로는 이미 가능한 일일 것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한 무시무시한 미래 예측들)


그런데 과거에 예측된 미래 기술 중에서 꽤 일찍 보급되었으면서도 별로 각광받지 않는 게 있으니, 바로 화상 전화다. 나 역시 어릴 때에는 ‘미래에는 전화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멋져!’ 하고 생각했지만, 이게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된 지금에는 어째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굉장히 멀리 떨어진 가족이나 연인이 "가니메데 날씨는 어때? 토마스가 벌써 걸어다니는 것 좀 봐! 사랑해,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 따위 감동적인 말을 주고 받을 때 쓰는, 일종의 클리닉 같은 것이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전화라기보다는 ‘실시간 영상 메시지’ 라고 하는 게 더 실감이 난다. 친하면 친한 대로 그런 걸 보낼 이유가 없고, 친하지 않으면 친하지 않은 대로 당연히 그런 걸 보낼 이유가 없다. "에일리언 2”를 보면 주인공 리플리의 상관격인 인물이 화상 전화를 걸어오는데, 솔직히 시도때도 없이 화상 전화를 걸어오는 상관 밑에서는 일하기가 몹시 고역스러울 것 같다. 이건 갑자기 방에 쳐들어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3시쯤에 화상전화로 잠깐 미팅 할 수 있어?" 처럼 약속을 잡으면 몰라도, 뜬금없이 화상전화를 걸어대면 그때마다 얼굴과 주변 상황을 볼만한 꼬락서니로 정리하느라 여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화상전화가 달갑지 않은 이유에는 계속 서로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도 있다. 상대의 시선을 내가 직접 조절해야 되니까 내 얼굴이 아닌 곳에 비출 수도 없고 상대도 마찬가지니까 서로 얼굴만 볼 수밖에 없는데, 누구 멱살을 자주 잡아본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게 어색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누군가와 대화할 때 어지간해서는 얼굴만 보지 않는다. 상대가 어지간히 매력적이라 얼굴을 뜯어먹고 싶을 지경이 아니라면 대체로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이나, 서류, 노트, 혹은 화젯거리를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봐 가면서 얘기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상대와 단둘이 마주 앉아서 정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할 일이 일상 속에 그리 많지도 않다. 매일 누군가 얘기할 때마다 칼같이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만 보고 얘기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상대방 얼굴을 계속 보는 것도 겸연쩍은데, 상대가 내 얼굴을 계속 보는 건 더 끔찍하다. 차라리 서로 손만 보여주는 편이 마음 편하겠다. 손만 보여주는 화상전화라니, 써놓고 보니 이쪽이 훨씬 민폐스럽지 않으면서 섹시한 느낌이 든다. 이 기술이 보급되면 반지나 네일아트가 대유행하겠군.


그런 한편 꽤 재미나고 저런 거라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화상 전화 장면이 영화 속에서 나온 적 있다. “땡스 포 쉐어링”이라는 2012년 작인데, 여기서 꽤 괜찮은 분위기가 된 아담(마크 러팔로)과 피비(기네스 펠트로)가 노트북으로 화상 전화를 하면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음식을 각자 준비해서 따로따로 먹는 거라 서로 나눠 먹을 수는 없지만, 이거라면 서로 얼굴만 들여다볼 필요없이 시선을 꽤 자유롭게 조절하면서 밥도 먹고 대화도 할 수 있다. 나름대로 건배하는 기분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엉덩이가 가려워진대도 화면 뒤로 돌아가서 긁으면 되고 방귀가 마려워도 마이크를 끄고 새침한 표정으로 뀌면 된다는, 현실 이상의 장점도 있다. 원거리 연애를 하는 커플들이라면 시도해보면 어떨지? 너도나도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보고 웃고 떠들며 식사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기술이 인류를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같아서 재미있다. 

(화면을 보며 누군가와 식사한다는 발상은 이미 실현되어 있다. 음란물 아님.)


뜻밖에도 공포영화인 “파라노말 액티비티 4”에서도 화상 전화가 매력적으로 나왔다.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인 알렉스(캐서린 뉴튼)는 노트북을 사용해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남자친구와 화상 전화를 밥 먹듯이 하는데, 아예 잘 때도 자기가 자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통신을 연결해 둔다. 그 때문에 이상 현상이 기록된다는 내용인데... 공포스러운 내용은 떠나서 자다가 잠깐 깨었을 때 연인이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퍽 낭만적이다. 만질 순 없어도 그럭저럭 한 공간에서 잔다는 기분도 날 것 같다. 화상 전화로 원거리 식사를 한 다음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끌어안고 침대로 가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애정전선 문제없음이다. 여기에 애플워치까지 차고 있으면 상대의 심장박동까지 원격으로 느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기술의 승리가 아닌가!

(물론 자다가 깨서 본 영상이 이런 거라면 좀 곤란하다)


요는 화상 전화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할 수 있다는데 얽매이지 말고, 일상적인 대화가 그렇듯이 두 손과 시선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화 말고 따로 할 거리를 놓으면 딱히 화상 전화라는 부담 없이 상대가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인데, 페이스타임을 강력한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애플도 화상 전화를 이렇게 쓰라는 설명이나 마케팅을 하진 않는 것 같다. 마케팅으로 하기에는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얼굴보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게 나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부담스럽지 않게 화상 전화하는 법을 생각해냈으니 얼마든지 화상 전화를 하면 되겠군! 하고 생각했지만... 이게 웬걸, 화상 전화 할 상대가 없다. 기술은 있는데 거기 사람은 없으니 이거야말로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는 인생이군. 


(2015.03.18.)



-후기

이 글을 게재하고 나서 화상 전화를 잘 쓰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제보를 여럿 받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가족이나 연인들이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는 것이죠. 아마 그 말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화상 전화를 쓰지 않습니다. 애초에 전화도 싫어하는 걸요. 그렇지만 저 개인의 특수함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역시 옛날에 기대했던 것만큼 화상전화가 모두의 생활 속에 잘 파고 들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메일이 편지를 누르고 기본이 된 것처럼 화상전화가 전화를 누르고 기본이 되지는 못했죠. 화상전화가 멋지긴 하지만 전화보다 더 편리한 기술이 되진 못했고, 전화와 별개의 기술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그나저나 애플은 테이블에 전자 제사상을 차리고 화상 전화로 제사 지내는 광고를 낼 생각은 없는지? 그거라면 모두 솔깃할 것 같은데 말이죠.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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