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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30. 2020

2020년을 채색한 소비의 행적

2020년에 희망이 넘쳤다고 생각하는 이는 얼마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적지 않은 슬픔과 절망을 겪었고, 많은 계획이 연기되었으며, 자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온라인으로 만나는 법을 배웠으나 동시에 온라인 모임이 실제의 모임을 충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도 배웠다. 잡문도 별로 쓰지 못했다. 불안 증상이 잦아졌고 12월부터는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정서적으로 목발을 짚고 있는 셈이다. 내 인생에 좋은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저러나 시간은 지나고 인생은 흘러간다. 꼭 좋은 일이 일어나야만 가치 있는 인생은 아니고, 동굴 벽에 맺힌 이슬만 핥아먹는 듯한 시간에도 색채를 더할 수는 있다. 대체로 택배로 배달되는 색채들이다. 오랜만에 쓰는 이 글에는 2020년의 동굴 생활에 색채를 더한 물건들을 정리해본다.


  

    로봇청소기 라이프로 RX9  

이미 수필로 소개한 적이 있는 로봇청소기다(링크). 어머니가 청소하는 모습 보기가 답답해서 내가 틈틈이 청소기를 돌리다, 나를 대신할 기술을 놓고 이러는 것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검색 끝에 구입한 국산 제품이다. 여러 리뷰에 따르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청소 성능이 준수하고 2세대 물걸레질을 지원한다. (내맘대로 구분한 물걸레질 1세대는 그냥 물이 새어나오는 방식, 2세대는 분무량을 펌프로 제어하는 방식, 3세대는 여기에 더해 걸레를 스프링으로 눌러주는 방식이다.)


분무량이 최소도 많아서 물구멍을 테이프로 막고 바늘구멍만 내는 개선을 거처야 했고, 코드 따위에 걸려서 위치와 지도가 맞지 않으면 열심히 그린 지도를 날려먹고 자기 위치도 갈 길도 잃어버리는  문제가 있어서 2020년을 방황하는 현대인으로서 동병상련을 느꼈으나 업데이트 후 해당 문제를 다시 겪진 않았다. 나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로봇이다.


아무튼 로봇청소기를 들인 뒤로는 기존 청소기를 돌리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슬리퍼를 신고 사는 입식 생활자로서 바닥은 적당히 깨끗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나도 이제 방을 매일 청소하는 깔끔쟁이가 되었다. 로봇은 인간과 달라서 똑같은 일을 아무리 반복해도 지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으니 청소를 매일 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궂은 일을 무한히 시키자니 사람으로서 마음이 좀 편치 않을 따름이다. 배터리에 좋은 친환경 전기라도 먹여주면 좋으련만 충분한 보상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북 리더 오닉스 포크2  

예전 소개(링크)

전자잉크 패널이 들어간 기기의 가성비가 그리 좋지 않고 과학적으로 눈이 편하다는 근거도 없다는 얘기를 들어서 망설이다가 냅다 지른 물건인데, 반사가 적어서 장시간 독서시 눈이 편한 게 맞다.


이북 리더를 이용한 독서는 종이책을 볼 때에 비해 가벼워서 좋을 뿐더러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정서적 포만감도 훌륭하다. 필수 기기라고 주장하지는 못하겠으나 저반사 흑백 패널의 편안함(다만 컬러 기종이 조만간 보급된다)과 고성능 안드로이드의 범용성을 모두 누리고 싶은 연재물 독자라면 진지하게 고려할 만하다.


항상 느끼지만 책 읽을 시간에 독서 전용 기기를 집는 것과 태블릿을 집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독서는 아직 물질계에 종속되어 있고 멀티태스킹과 잘 맞지 않는 행위인 것 같다.



  

    방탄커피  

커피에 버터와 mct오일을 타서 마시는 이 음료도 유행이 좀 지나간 것 같은데, 나는 올해 반 년 이상 음용하고 있다. 마시기만 하면 살이 빠지는 신비의 음료는 아니고 간헐적 단식 중에 자가 섭취를 가속하고 기력을 보충해주는 정도라고 보면 더 맞을 것 같은데, 복잡한 이론과 효능은 건너뛰고 아침을 대신할 수 있어서 좋다. 로봇 청소기와 마찬가지로 노동의 최소화 측면에서 채용된 셈이다. 어차피 아침에 커피는 마셔야 정신이 드는 몸뚱아리가 되었는데 식사까지 같이 해결하니 얼마나 좋은가. 밥 대신 알약만 먹을 거라는 미래 식생활에 근접한 물건이 있다면 아마 이 방탄 커피나 볶은 귀리일 것이다.


참고로 운동과 병행한 효능은 그렇게까지 크진 않았다. 반년간 허리 둘레 6센티 정도만 빠졌다. 그리고 건강에 어떤 문제를 유발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었는데 검사 결과 혈액도 위도 정상이었다.


다만 식사 한 끼를 간단히 대체하는 즐거움이란 결국 식생활의 즐거움을 일부 포기하는 것과 같다. 종종 아침을 챙겨 먹는 게 보통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런 날이 돌아올지는 의문이다.



  

    피트니스 복싱2  

영상 광고

비교적 최근에 산 닌텐도 스위치 게임이다. 그러나 1년간 링피트를 잘 해놓고서 피트니스 복싱을 더 높게 쳐주는 것은 최근에 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운동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링피트는 분명 간단한 RPG 육성이 잘 버무려진 전신 피트니스 게임이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어째 포션에 종속되고, 이리저리 유리한 운동을 골라대다 보니 게임 시간과 운동 시간이 크게 차이가 나기 일쑤다.


그에 비해 피트니스 복싱은 리듬에 맞춰 끊임없이 주먹질을 해댈 뿐이다. 아주 순수한 운동이고, 저스트 댄스처럼 기억하기 힘든 동작들을 따라한다고 헤매거나 링피트처럼 아이템을 준비한다고 궁리할 필요도 없다. 허공에 힘껏 주먹질을 해대다 보면 답답한 속이 시원해지는 구석도 있다. 게다가 익숙해지면 뭘 보면서도 할 수 있고, 영어에서 일본어로 교체 가능한 더빙 성우진이 황당할 정도로 화려하다는 것도 제법 큰 장점이다. 링피트보다 저렴하기도 하고 2인도 지원한다. 무협 액션 영화를 보고 섀도우 복싱을 해봤거나 당장 자기 자신이라도 두드려 패고 싶을 만큼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이라면 링피트보다 복싱을 추천하고 싶다.  앞으로 피트니스 킥복싱이나 CQC, 건카타도 나와주면 좋으련만.


  

    벌집 젤리 방석  

마치 의자와 함께 태어난 것처럼 의자에 붙어 지내는 나날이 이어졌는데, 덕분에 목부터 등허리, 꼬리뼈까지 멀쩡한 곳이 없는 듯 싶었다. 그 와중에 간증글이 여럿 보이기에 속는 셈치고 하나를 사보니, 그간 편하다고 생각했던 매쉬 방석의 다섯 배쯤 편하다. 벌집 모양의 젤리가 무게를 적절히 분산해준다는 설명대로 작용하는지 이 녀석을 산 뒤로 꼬리뼈가 아픈 증상은 깨끗이 사라졌다. 장시간 이동도 잘 못견디는데, 앞으로는 이동할 때도 차에 갖고 갈까 싶을 정도다.


이렇게 기술 발달이 인체 파괴를 막아준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게 됨으로써 결국 노동자는 더 비인간적인 노동에 시달리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도 미봉책인 셈이지만, 아무튼 미봉책 중에서는 저렴하면서도 효과가 빼어나게 좋았다.


  

    ticktick  

기본 무료인 할일 관리 앱인데 기능이 탄탄해서 추가했다. 모든 운영체제를 지원하고 인터페이스가 말끔하며, 할일을 미루는 데에 최적화 되어 있다. 할일 관리 앱이 미루기 좋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사실 할 일을 미뤄야 할 경우는 아주 많다. 오후 8시에 체조를 한다는 알림을 만들었어도 그때 커피를 타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하자고 알림을 대충 넘겨버리고 완전히 망각하기 일쑤인데, ticktick은 팝업 화면에 뜨는 스누즈 옵션이 15분 뒤, 오늘 오후, 내일 오전 등등 다양하게 제공되고, 원하는 시간으로 미루는 방법도 단순명쾌하다. 덕분에 이따 하자, 이따 하자, 하고 미루면서도 까먹지는 않을 수 있다. 2do를 메인으로 쓰면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잡다한 일, 가령 화분 물주기 따위의 알림을 ticktick으로 바꿨는데 아주 만족스럽다.


  

     로드 오브 히어로즈  

2020년 게임대상을 받으며 소소하게 장안의 화제가 된 모바일 게임이다. 다섯 명짜리 팀의 장비를 잘 맞춰서 턴제로 전투하며 적절히 스킬을 써서 공략하는 방식이다. 캐릭터 디자인이 수려하고 선정성이 거의 없으며 캐릭터 뽑기식 과금 대신 캐릭터 상당수를 로그인 보상으로 주거나 확정적으로 판매한다. 대신 장비 수급, 강화 등이 뽑기인데 꼭 과금을 요하는 것도 아니고 소액 과금도 보상이 확실해서 만족도가 높다.


게임 내 편의 기능은 아직도 한참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여러 게임 내용에 몰입하지 못했는데 이 게임은 이야기가 뻔하면서도 취향에도 맞고 따라가기가 즐거웠다. 심지어 대단히 교육적이라 과장하면 교과서에 싣자고 주장하고 싶을 지경이다.


게임적으로도 이렇게 저렇게 하면 다음 스테이지도 어떻게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면이 강해서 고군분투한 날이 제법 되었다. 12월 중순 엘리트 스토리 개방 전에 최종 보스인 황제를  잡고 보상을 받는 게 일종의 관문처럼 여겨졌는데, 서버 점검 5분 전까지 이리뛰고 저리 뛴 끝에 마침에 엘리트 황제를 잡은 게 나의 2020년 최대 업적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난관을 내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한 희열을 느끼는 게 무척 오랜만이었다.



  

     반지의 제왕:가운데땅 여정, 광기의 저택  

두 가지 보드게임인데 시스템이 동일해서 한데 묶었다. 코로나19 상황이 훨씬 나았을 때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서 열심히 한 게임들이다. 둘 다 앱이 내리는 지시에 따라 맵을 깔고 전투하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협력 롤플레잉인데, 앱까지 동원해서 할 거면 그냥 전자 오락을 하는 게 낫겠다는 내 생각을 바꿔주었다.


이벤트와 스토리 따위가 앱으로 진행되니 예측이 불가능하고 덱을 일일이 섞어서 뽑는 번거로움이 줄었다. 확장 추가도 간편하고 효과음이나 BGM도 알아서 나온다. 전자 오락 RPG를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되, 피규어를 만지고 카드를 섞고 주사위를 굴리는 손맛과 보드게임 특유의 디오라마적 임장감은 살려놓은 셈이다. 보드게임의 미래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반지의 제왕은 세계관만 가져와서 자체적인 스토리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특정 멤버가 파티를 짜고 캐릭터를 성장시키며 캠페인을 쭉 따라가게 되어 있고, 광기의 저택은 크툴루 세계관 내의 개별 사건을 다룬 시나리오를 일회성으로 클리어하게 되어 있다. 정해진 인원이 지속적으로 하며 캐릭터를 키우는 재미를 즐기자면 반지의 제왕이 좋고, 인원 구성을 바꿔가며 유동적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자면 광기의 저택이 좋다.


다만 빠듯하게 짜여서 사건이 촉박하게 돌아가는 몰입감은 광기의 저택이 압도적이다. 게임 한 판에 몸과 마음이 모두 뻐근해질 지경이다. 안 그래도 빡빡하고 괴로운 세상을 피해서 뛰어드는 세상이 또 광기와 공포로 물들어 있다는 건 묘한 일이지만 고통 없이 달콤하기만 하다면 그건 매력적인 게임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크툴루의 부름(COC)  

초메이저 TRPG다. TRPG(테이블 토크 롤플레잉 게임)는 롤플레잉 게임의 원형으로, 컴퓨터 없이 마스터의 진행에 따라 수기로 하는 역할 놀이라고 설명하곤 하는데, 요즘은 VR기기 없이 하는 VR게임이라는 해석이 매력적이다.


크툴루의 부름은 그중에서도 호러 계통의 뼈대 있는 시스템이다. 국내판 발행은 2016년이었으니 나는 아주 늦게 입문한 셈이다. 다만 그 덕분에 시나리오는 세상 천지에 널려 있어서 고르기가 힘들 지경이다. 아무튼 룰북이 워낙 두꺼운 데다 마스터링에 트라우마도 있고, 할 게임도 부족하지 않아서 손대지 않았는데, 코로나 19 상황이 악화되어 도저히 모임에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온라인으로 할 수 있으면서도 실제 모임에 비해 그리 부족하지 않은 놀이로 TRPG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년만에 마스터로 복귀해서 온라인으로 TRPG를 해보니, 2000년대 초반에 비해 세상이 많이 좋아진 게 실감났다. 규칙이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세계관이 매력적인 덕인지 COC의 인기가 대폭발해서 한국어 자료는 말그대로 넘쳐났고, 나는 아이패드 앱 플렉슬로 PDF를 띄워놓고 미리 작성한 메모를 뒤적여가면서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Roll20이라는 온라인 툴 덕분에 캐릭터 시트, 주사위 결과, 지도 상황도 실시간 공유할 수 있어서 오프라인 모임보다 편리한 점도 많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온라인으로 진행한 TRPG는 나름대로 플레이어 반응이 좋았고, 나도 그럭저럭 만족했다. 다른 것보다 '도저히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새롭게 즐길 거리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큰 수확이었다.



이렇게 2020년을 빛낸 물건들을 아홉이나 뽑아봤는데, 돌아보니 허망하고 암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해를 나름대로 잘 채우고 재미나게 보내려고 고군분투 했구나 싶다. 역시 삶에 희망이 새로 생기진 않더라도 색채는 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색채가 희망 비슷하게 보인다면 더 좋은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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