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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22. 2021

믿을 수 있는 문구점

학용품을 이것저것 많이 사용하던 학생 때는 오래도록 문방구 구경을 하곤 했다. 항상 쓰는 물건이니 깊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탓이리라. 고등학생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제법 커다란 필통에 색색깔의 볼펜, 형광펜, 색연필, 수정테이프, 칼, 드라이버 따위를 서바이벌 장비처럼 종류별로 구비하고 다니며 누가 뭐 있냐고 물어보면 짠 하고 꺼내어 뭐든 있는 사람인 양 잘난체 하는 것이 인생의 소소한 낙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쯤 되면 무겁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한데, 그때는 필통이라는 물건에서 무게를 느끼지도 못할 만큼 건강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를 떠나고 필기구를 사용하는 학습과도 그닥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니 학용품을 잔뜩 챙겨 다니긴커녕 가방에 펜 한 자루만 있어도 다행이다 싶은 처지가 되었다. 애초에 긴 글을 손으로 쓸 일이 별로 없으니 다이어리를 쓰거나 잠깐 뭘 메모할 때가 아니면 펜이 사용되지 않아, 서랍 속에 십수 년 묵은 필기구가 목적을 잃은 고대 병기처럼 잔뜩 굴러다니는 형국이다. 


아마 이 속도라면 20년 뒤에도 비슷한 상황일 것 같다. 아니, 어디서 판촉물이나 사은품으로 주는 펜이 쌓이는 속도를 생각하면 필기구는 불어나기만 할 것 같다. 이대로라면 필기구 만드는 회사들도 난처해져서 손편지나 필기구를 주고받는 ‘레터 데이’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고, 저 바깥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이틀 만에 펜 한 자루씩 소모해가며 무시무시하게 많은 글자를 적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나저나 얼마 전에는 지워지는 펜이 필요해서 집 근처를 헤매였다. 나는 보드게임을 하면 언제 누구와 했는지 도서 대출 카드처럼 기록지를 만들어 보드게임 안에 넣어두는 습성이 있는데, 내용을 이것저것 적다 보면 틀리는 경우가 많아서 지워지는 펜으로 적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이 다이소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근처 잡화점에도 없었다. 아파트 상가 깊은 곳에 모닝글로리가 있지 않았나 싶어 거길 찾으려고 보니 점포의 흔적조차 없었다. 별수 없이 이번에는 15분 거리의 알파 문구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알파 문고도 깨끗이 지워지듯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 시국이라 학용품이나 사무용품 사용될 일도 줄어든 탓에 버티지 못한 것일까?


허탈한 심정으로 지도를 켜고 가까운 문구점을 검색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 가는 길에 제법 그럴듯한 모닝글로리가 한 군데 더 있었다. 인근에 학교가 둘이나 있어서 무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 모닝글로리에 들어가 보니, 주인장은 약간 깐깐한 인상에 안경을 낀 중년 남자였다. 펜 진열대는 카운터 정면에 있었다. 지워지는 펜이 있을까 없을까…… 다행히 있었다. 나는 안도하며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주인장이 말을 걸었다.


“그 펜은 지워지는 펜입니다.”


하기야 마찰열로 지워지는 펜이라고 써있지 않으니 잘 모르는 사람이 펜 모양만 보고 살 일이 있을 법도 했다. 퍽 친절한 안내였다. 나는 반가운 김에 이 펜을 사려고 근처를 찾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주인장은 말했다.


“하긴 요즘은 많이 빠졌죠.”


출시되었을 때 좀 인기가 있었다가, 그렇게까지 요긴하게 쓸 일이 없어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게 된 것일까? 아무튼 내가 혁신적이라고 생각하는 물건의 인기가 시들해졌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파란색 한 자루를 구입했다. 결제할 때 주인장은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파란색까지는 리필심이 있습니다.”


나중에 다 쓰거든 리필심을 사서 끼워 쓰라는 뜻이다. 펜의 리필심을 사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주 신선한 정보였다. 그리고 사실 주인장으로선 굳이 리필심까지 구비할 이유도, 묻지 않은 것을 안내할 의무도 없었을 텐데 거기까지 얘기해줬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전문적이고 양심적인 분이구나 싶기도 했다. 양심이 바르고 훌륭하다는 이유로 냉장고를 받아야 한다면 이 분도 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그 일이 있고 몇 주가 지난 최근에는 조그만 피규어의 자작 소품을 살짝 색칠할 때 사용할 노란색 네임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단 당연한 수순대로 가까운 다이소에 갔다. 그런데 노란색은 12색쯤 되는 세트에만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따지고 보면 도합 4센티미터쯤 되는 선만 그리면 그만인 상황에 20년쯤 쓰고도 남을 네임펜을 색깔별로 구비하고 싶지는 않아서, 이번에도 그 신뢰의 모닝글로리를 찾았다. 이번에는 주인장 말고도 젊은 남자분이 한 명 더 있었다. 아마 아드님이 아닐까?


그런데 노란색 네임펜을 따로 팔지 않는 것은 일종의 업계 상식인듯, 여기도 노란 네임펜을 낱개로 살 수는 없었다. 물체 표면에 ‘이름’을 또렷이 쓰는 게 주 목적인 펜이니 노란색은 좀 별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노란색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충분한 세력을 이루고 항의할 날이 오길 바란다.


아무튼 여기까지 온 김에 사는 게 낫나 잠시 고민했다가, 나는 발길을 돌렸다. 피규어 소품 하나 칠하자고 있는 줄도 몰랐던 색깔의 네임펜들을 세트로 갖기가 너무나 싫었던 탓이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쓸데없는 학용품을 몇 가지 정리해서 내다버린 참이다.


그런데 출구를 나서려는데, 지켜보던 젊은 남자분이 말을 걸었다. 


“금색이라면 따로 있습니다.”


금색이라, 원하는 건 노란색이지만 금속성을 표현해도 나쁠 건 없었으므로 나는 곧장 그분이 집어주는 금색 네임펜을 샀다. 하기야 크레파스도 금색과 은색은 참으로 인기 있는 색이라 금방 떨어지곤 했다. 같은 이유로 네임펜도 금색 은색은 따로 팔 만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나가다 말고 은색 네임펜도 있느냐 물어 한 자루를 더 샀다.


그리하여 구입한 네임펜들은 계획대로 잘 쓰고 서랍에 넣어뒀다. 사실상 노란색이 포함된 세트보다 돈을 더 쓰게 되었지만, 딱히 후회되진 않는다. 결과물도 좋았고, 무엇보다 좋은 가게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 기뻤다. 영화 ‘존 윅’을 보면 총기 소믈리에가 나와서 주인공의 문의에 친절하게 답하며 이 총 저 총을 보여주고 파는데, 온라인 쇼핑이 주가 된 데다 여차하면 속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경우가 많은 요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믿을 수 있는 오프라인 점포를 확보하는 건 소박한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동네에 15년 넘게 살고도 이렇게 좋은 가게를 몰랐다니. 앞으론 종종 별일도 없이 모닝글로리 구경을 갈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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