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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24. 2021

전국 OTT 자랑

디즈니 플러스가 상륙하면서 구독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OTT가 또 하나 늘고 말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런 식으로 구독하는 서비스가 하나씩 늘다 보니 까짓거 못 낼 것도 없지 싶은 금액의 폭풍에 휘말리는 것 같다. 게다가 가족 공유로 부담을 줄이곤 있지만, 가끔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째 그건 요즘 전혀 안 보는 것 같은데 해지하면 안 되나?’ 싶을 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딸린 계정들을 생각해보면 어느날 갑자기 해지할 수도 없다. ‘요즘 내가 안 써서 구독을 정지할 테니 그렇게 알고 다음달에 알아서 구독을 하든 그만 보든 하시오’라고 일일이 공지를 하는 것도 매정하고 야박한 건물주가 된 기분이다. 딱히 불합리한 일도 아니지만 상대를 약간 귀찮은 선택의 기로로 내몬다는 점에서 나 자신도 좀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리하여 어찌저찌 서너 가지 서비스를 동시에 구독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애니메이션은 보고 있어도 어째 흥이 나지 않아서 라프텔(애니 전문 서비스)은 해지하고 돌아보지도 않게 되었다. 다른 경로로 화별 결제도 가능한 때가 많아 묘한 계산을 하게 만드는 게 피곤스럽기도 했다. 화별 가격을 아니까 ‘대충 하루에 한 편 정도는 봐야 본전인데?’라는 식으로 따져보게 되고, 결국 어지간히 볼 게 많은 시즌이 아니면 구독을 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볼 게 많은 시즌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 문제라기보다는, 오래도록 이것저것 본 탓에 어지간해선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된 탓이리라.


그런데 볼 게 적은 시즌이라고 화별 결제를 해서 볼 작품을 잘 챙겨보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애니메이션은 틀어놓고 운동도 하고 게임도 하는 식으로 ‘느긋이’ 소비하고 싶은데, 주머니에서 돈을 지불하면 ‘느긋이’ 소비한다는 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방금 막 돈을 냈다는 이유 만으로 느긋이 보던 작품을 한 장면도 빠짐없이 보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다. 요컨대 작품을 마음 편히 대충 감상하기 위해서는 과도하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구독제로 이용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것도 참 황당한 짓이라 양쪽 다 포기하고 말았다.




홈화면이 '소문난 잔치' 모음집이 되어가는 중

돌이켜보면 이 ‘마음 편함’은 불합리한 것 같으면서도 요즘 콘텐츠 감상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디즈니 플러스는 극장에서 보지 못한 ‘샹치’ 한 편이라도 보면 본전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시험 삼아 구독했는데, 막상 틀어보니 샹치가 그렇게까지 편히 볼 영화는 아니라 중간에 정지한 뒤로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영화가 불쾌하다는 건 아니고, 중간중간 소리만 들으면서 대강대강 넘길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소리다. 등장인물들이 화려한 무협 액션을 펼치니까 당연한 일인데, 그렇다고 손에 땀을 쥐고 몰입할 만한 희대의 걸작은 또 아닌 듯해서 포지션이 애매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괜찮은 여가용이지만 휴식용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디즈니 플러스를 훑어보는 김에 샹치 말고도 재미있을 것 같은 작품 몇 가지를 찜해놓기도 했으나 그리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찜해놓기만 하고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어쩐지 확 끌리는 작품이 없었다. 괜히 디즈니가 아닌 만큼 마블쪽으로 좋은 작품, 유명한 작품은 뻔히 있는데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벤저스 시리즈의 대단원인 엔드게임 이후로 마블에 대한 흥미가 고갈된 마당에 사랑과 우정과 모험의 세계에 말려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재미있기를 바라지만 흐르는 시간의 키는 내가 쥐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즘은 심신을 쉬고 싶을 때면 유튜브에서 ‘과학하고 앉아있네’, ‘신박한 벙커’, ‘안될과학’, ‘최재천의 아마존’, ‘장동선의 궁금한 뇌’등의 과학 교양 채널을 틀어놓고 딴짓을 한다. 시사 채널이나 일반 교양 채널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채널의 내용은 너무 내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는 부분이 많아 휴식 이상으로 집중해야 하기에 좋지 않다. 요컨대 노력은 들이지 않고 재미와 지식이라는 보상만 얻겠다는 도둑놈의 심보인 셈인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득을 보겠다는게 그렇게까지 지탄받을 일은 아니겠지?


그나저나 교양 방송으로는 당연히 교육방송인 EBS가 전통있는 절대 강자라고 해야 마땅한데, 최근에 EBS에서도 구독제 서비스를 런칭하면서 구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늘고 말았다. 정말이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세상에 수업이 자기것뿐인 줄 아는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작작 좀 하면 안 되나’ 싶다. 하지만 확실한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수익 모델을 어느 기업이 포기하겠는가. 


그나마 애니메이션 쪽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다. ‘라프텔’이 몇 개 수입사의 애니를 모아서 서비스하기 때문이다. 다른 수입사의 방영일보다 좀 늦게 나오긴 하지만, 여러 곳을 다 이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편리하다. 새로 방송된 회차를 누구보다 빨리 봐야 한다는 강박이나 그런 상황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비슷한 개념으로 여러 OTT를 통합해서 서비스해주는 OTT 같은 게 나와주면 좋겠는데, 지금껏 나오지 않은 걸 생각하면 앞으로도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차례로 돌아가면서 1월에 넷플릭스, 2월엔 왓챠, 3월엔 디즈니 플러스…… 이런 식으로 번갈아 구독하는 게 제일일지도 모르겠다. 친구들과 얘기해야 해서 무슨 서비스를 구독할 필요에 쫓기고 있다면 아예 OTT감상 그룹을 조직해서 커리큘럼대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콘텐츠를 보며 노는 것도 방법일지 모르고.


돌이켜보면 OTT 서비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놀자고 다같이 대여점에 몰려가서 주인 아저씨 말만 믿고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를 빌려다 보곤 했다. ‘그리운 그때 그 시절’에 본 영화가 제일 재미있었다고는 못하겠지만, 뭐가 재미있을까 고민에 시달리거나 뭘 꼭 봐야 한다는 이유로 무슨 서비스에 가입을 할까말까 번민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피로감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한 소비에 분명 미덕이 있긴 했던 것이다. 즐길 게 너무 많아져서 심각한 고민에 시달리게 될 줄, 그리고 그러고도 볼 게 없다고 느끼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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