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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16. 2022

연주회 감상의 기쁨

음악회에 갈 일이 잘 생기지 않는 편이다. 연주자들이 모여 실제로 눈앞에서 연주하는 음악회의 특성상 티켓이 비싼 것도 이유고, 공연장이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올 만큼 가깝지도 않다는 것도 이유인데, 주변에 음악회를 같이 자주 즐길 사람도 없는 데다가 나 자신도 음악회 관람에 그렇게까지 만족한 기억이 없다는 게 무엇보다 결정적이다. 만약 너무 좋다고 감탄한 적이 있으면 다른 지출을 줄여서라도 종종 갔으리라. 하지만 보드게임을 사면 몇 년 내내 즐겁게 갖고 놀 수 있을 돈을 만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경험 한 번에 쏟아붓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쳇바퀴같이 비슷한 오락 문화를 반복하던 와중에 후배 한 명이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다가 정신이 나갈 것 같다며 ‘블록버스터 영화 음악 콘서트’라는 음악회를 찾아서 같이 갈 사람들을 모으기에 보니, 유명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연주하는 음악회였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를 비롯해서 익숙한 곡이 많기에 나도 큰맘먹고 가기로 했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사운드 트랙을 직접 들을 수 있다니, 그건 4만 원을 내고 코로나의 공포를 무릅쓰며 갈 가치가 있는 공연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어제는 수백 년만에 블레이저까지 꺼내 입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는데, 마침 보드게임 중고 거래가 성사되어 택배를 부치느라 시간을 소모했더니 가는 길 내내 뛰면서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음악회는 늦으면 안 들여보내는데, 떼쓰다가 구정물을 맞고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나면 어쩌지? 택배는 나중에 부칠걸. 늦어도 별 문제 없는 약속만 하다 보니 이 꼴이 되었구나…… 하는 식이었다. 아무튼 뛴 보람이 있게도 제시간에 간신히 예술의 전당에 도착해서 일단 숨을 돌리긴 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공연을 하는 음악당은 또 입구에서 또 수백만 킬로는 떨어져 있어서 그야말로 피말리는 심정으로 달려간 끝에야 무사히 입장할 수 있었다. 넓고 복잡하며 표지가 별로 없는 예술의 전당 구조에 저주 있으리.


간신히 찾은 우리 자리는 제일 저렴한 4만 원짜리 합창석으로 연주자들을 왼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좀 과장하면 악보까지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깝게 느껴져 재미있기도 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를 언제 이렇게 가까이서 내려다볼 기회가 생기겠는가.


프로그램은 일단 듣자마자 알 수 있는 어벤저스 메인 테마로 시작했다. 평소에도 어울릴 만한 상황에 즐겨 듣던 곡이라 당장 좋은 공연을 보러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오프닝으로 잘 어울렸다. 하지만 관악기와 타악기 등이 연주될 때마다 귀가 따갑다는 느낌이 들어 약간 편치 않았고, 악기들간의 음량도 조화롭지 않게 들렸다. 악기 배치가 정면에서 감상하게끔 구성되었을 텐데 그걸 바로 옆에서 들으니 너무나 가까웠던 탓이리라. 괴롭거나 불쾌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일행 한 명은 왼쪽 귀에 이어폰을 끼어야 했다.


그래도 다음 곡이 아이언맨으로 이어지니 가까워서 좋은 점도 있었다. 토니 스타크가 수트를 두드리는 소리를 ‘작은 종 같은 악기’를 ‘망치 같은 것’으로 두드려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그 망치질을 가까이서 보니 생동감이 넘치고 토니 스타크의 모습도 떠올라 감동이 진했다. 음향에서 손해를 봤지만 시각적인 면에서는 나름대로 이득을 본 셈이다.


그 뒤로 1부에선 해리포터, 아바타, 토르, 글래디에이터가 이어졌다. 그중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단연코 해리 포터였다. 아바타는 보지 않았고 글래디에이터는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으며 토르는 음악이 인상적인 영화는 아니었던 탓도 있지만, 마법이 깃든 호그와트를 엿보는 듯 조심스럽게 똥땅거리는 첼레스타 소리로 시작하는 해리 포터의 프롤로그는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선사해주었다. 자리 위치상 첼레스타를 볼 수는 없었다는 게 한이다.


그렇게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우리는 간단히 감상을 나누기도 하고 다른 자리로 가서 우리가 보지 못한 위치의 악기도 구경했는데, 그것도 퍽 즐거웠다. 요즘 영화는 쉬는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도 음악회의 묘미라면 묘미일 것이다.



(감상에 약간의 지장이 있는 좌석은 팔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자리라도 팔아서 접근성을 높여주는 게 맞을까?)


잠시 후 2부는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미션 임파서블로 신나게 시작했고, 인셉션, 다크나이트로 이어졌다. 다만 인셉션은 멜로디가 기억에 또렷이 남는 음악이 아니라 좀 심심했고, 다크나이트도 대체로 비슷했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한스 짐머의 사운드 트랙 중에선 인터스텔라가 가장 인상적인데 왜 그건 없었을까? 심지어 공연의 홍보 이미지로는 찬란한 블랙홀을 넣어놨으면서 구성을 이렇게 한 것은 약간 속임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마 한스 짐머의 대표곡을 따로 연주하는 연주회 쪽에서 들을 수 있겠지.


그리고 이어진 것이 캐리비안의 해적. 캐리비안의 해적은 어째서인지 가장 유명한 ‘그 곡’만 굉장히 여러 번 들어서, 그 파트에 들어서자 발가락으로 리듬을 타면서 마치 지휘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래, 여기서 빰!’ 하며 매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리듬 액션 게임을 즐기는 듯한 느낌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힘이 가득하고 즐거운 곡이었다.


마지막은 반지의 제왕 메들리였는데,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을 코로나 유행 내내 즐긴 데다가 영화를 다시 뒤적인 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곡들의 특징도 또렷해서 모든 곡이 다 선명했다. 듣는 내내 영화의 장면들이 저절로 떠올라서 캐리비안의 해적을 들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열광할 수 있었다. 영상으로만 접하던 여행지에 직접 방문했을 때 느낄 법한, ‘그래, 여기가 거기잖아!’싶은 기쁨이랄까.


그리하여 기쁨의 릴레이가 다 끝나고 정신적 만복감에 젖어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앵콜곡이 연주되었다. 이 역시 누구나 바로 알 수 있는 스타워즈의 임페리얼 마치. 관현악의 후식으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고기를 배불리 구워먹고 볶음밥까지 해먹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익숙하고 즐거운 곡의 연타석 홈런 덕분에 밥을 먹으러 가면서도 내내 즐겁고 들뜬 기분이 계속되었다. 수많은 관중과 함께 스포츠 시합을 보고 응원가를 부르면서 지하철로 행진할 때 느낄 법한 고양감이었다. 근래에 들어 뭘 보고 이 정도로 신난 적이 없던지라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음악회가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다니?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 즐거웠던 것은 훌륭한 곡을 훌륭한 연주로 듣는 자리가 아니라 ‘익숙한’ 곡을 생생한 연주로 다시 듣는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내가 기대한 음이 내가 알던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쏟아지는 매순간을 연주자, 지휘자, 관객들 모두 함께 공유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바로 내가 느낀 고양감 아니었을까. 요컨대 너무 익숙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된 것들도 다른 방식으로 남과 함께하면 전혀 다른 기쁨을 주기도 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다 지겹고 그저그렇게 느껴지는 시기마다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고 보니 보드게임 처분한 값이 고스란히 연주회로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전혀 아깝지 않다. 이런 특별한 즐거움을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다면 오히려 길고 긴 즐거움이 될 테니 환영이다. 솔직히 두어달에 한 번씩 가기에는 역시 표값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가고 싶은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보드게임을 팔아치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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