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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13. 2022

내가 고칠 수 있으면 고쳐야지 뭐

1월에는 16만원을 주고 죽어가는 맥북 에어 2012를 고쳤다. 지난 줄거리를 간략히 다시 쓰자면 오랜 사용으로 CPU가 기판에서 분리되는 증상이 발생한 탓이었다. 전기공학이고 전자공학이고 쥐뿔도 모르는 나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컴퓨터를 새로 사기엔 돈도 돈이고 고르기도 어려워서 사설 수리를 했다. 그게 돈을 가장 아끼며 시스템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으니 고칠 수 있는 데에 감사해야 했다. 다만 익숙한 수리점의 설명이 오락가락했고 수리비도 전화로는 11만원이던 것이 찾아가 보니 15만원으로 뛰었기에 다른 수리점을 찾아가서 16만원에 맡겨야 했다는 소소한 문제는 있었다. 어렵게 찾은 방법도 왕좌로 향하는 붉은 융단처럼 깨끗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장장 일주일에 걸쳐 수리가 끝나고 기기를 찾으러 가자, 약간 무서울 정도로 깐깐해 보이는 기사님은 워낙 낡은 기기라 수리 장비 찾기도 쉽지 않았다면서 ‘영원히 쓸 순 없습니다’하고 고쳐진 맥북을 내밀었다. 덕분에 나는 감사한 한편으로 세월의 무상함에 고통받으며 집에 돌아왔는데, 천만다행으로 맥북 에어는 문제 없이 제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로부터 두 달 뒤에 형이 수리하고 쓰지 않은지 좀 되었다면서 맥북 프로 2015를 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맥북 에어를 고치지 말고 물어나 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당연하게도 머릿속을 스쳤지만, 잘 생각해보니 쓸 컴퓨터가 따로 있다고 맥북 에어를 수리하지 않고 대충 처박거나 헐값에 처분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정이 들었거나 원혼이 스몄을 테니까 내가 안고 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아무튼 번잡하고 성가신 과정을 거쳐서 맥북 에어의 영혼을 맥북 프로로 옮겼고, 이상이 없나 테스트도 마쳤고, 자리도 바꾸었다. 옷걸이로 만든 거치대가 무거워진 기기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서 보강하는 과정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로웠다. 맥북 프로의 뚜껑을 따보기 전까진.

멀쩡한 맥북의 뚜껑은 뭐하러 뜯었느냐? CPU 온도가 여차하면 90도를 넘기는 게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뜯어서 먼지도 털고 써멀 패드도 붙여야 했다. 그런데 나사를 풀자마자 하판이 밀려서 튕겨나오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배터리가 부푼 것이다. 리튬 계통 배터리는 노후되면 부풀어오르는데, 이 상태를 방치하면 잘 알려져있듯 폭발할 위험마저 있다. 뚜껑이 잘 안 닫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하여 여기저기 검색해 보니 배터리 사설 수리는 12만원에 달하는 돈이 들었다. 이번에도 웃어넘길 돈은 아니었다. 그래서 맥북 에어도 그렇게 했듯, 직접 교체하기로 작정하고 7만원대에 배터리를 주문했다. 다만 기대와 달리 중국쪽 문제로 배송이 지연되어 2주 이상 기다렸다. 그 사이에 뻥 터지진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새 배터리팩을 받아서 잘 놓은 뒤 맥북을 해체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제품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여기에도 있었다. 제품의 두께를 극단적으로 줄이느라 그런 것인지 배터리가 나사가 아닌 양면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히트 건이나 드라이어로 가열한 뒤에 플라스틱 주걱으로 떼어내야 하는데, 드라이어를 갖고 오며 부산을 떨기가 귀찮아서 그냥 주걱부터 힘껏 들이댔다. 자신이 넘쳐흘렀다.

테이프는 적당히 잘 떨어진 편이고, 가운데 배터리를 뜯기만 좀 어려운 편이었다. 그래도 성공했고, 새 배터리 이식도 성공했다. 스스로 ‘이 정도쯤이야’ 하고 웃으며 조립을 마쳤다. 그런데 전원을 켜보니 키보드와 트랙패드가 먹히지 않았다. 앞이 깜깜했다.
 
검색해 보니 이 현상은 해당 모델의 고질병인듯, 배터리를 교체했다가 비슷한 증상에 난감해진 사람이 적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들이 조언한 대로 메인보드와 트랙패드 보드를 연결하는 케이블을 닦고 다시 끼우고 난리를 쳤는데, 그 와중에 트랙패드 컨트롤 보드에서 어쩐지 ‘칙’하는 소리가 났다. 잘 보니 칩 하나에서 작은 불꽃 같은 게 어른거리더니, ‘퍽’하고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참 많았다. 주걱으로 잘못 건드려서 그런가? 배터리에 불이 나면 어쩌지? 소화기가 현관에 있었나? 없으면 맥북을 창밖에 던져야 하나? 손해배상이 더 커지지 않을까? 뉴스에 나오려나? 그럼 내친김에 유튜브라도 시작할까?

다행히 책상에서 한걸음 물러난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고민 끝에 트랙패드 쪽 케이블을 뽑은 뒤 맥북을 재조립하고 쇼핑몰에서 트랙패드 컨트롤 보드를 겨우 찾아내서 5만원대에 주문했다. 케이블이 손상되었다면 추가로 주문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명백히 칩 손상이 일어난 것을 봤으니 이쪽만 고쳐보기로 했다. 케이블만 해도 2만원 이상이었다.

주문한 보드가 도착하자 이번에는 배터리를 다시 뜯어내고, 트랙패드까지 뽑아서 새 부품으로 교환한 뒤 재조립해야 했다. 가슴 졸이며 확인한 결과는 수리 성공. 결과적으로 맥북 프로를 멀쩡한 상태로 만드는 데에 총 13만원 가량이 들었다. 사설 센터에서 배터리만 교체한 것보다 좀 더 든 것이다. 중간에 느낀 공포감과 절망감, 그리고 시간 낭비는 덤이고.

그러나 애초에 사설 수리 센터를 찾아갈 걸 그랬다고 후회하진 않는 것이, 나로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알아서 저렴하게 부품을 사서 잘 처리할 자신도 있었고, 경험도 있었다. 하면 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진 않았지만 경험 자체는 ‘전자기기 무서운 줄 알고 살살 다루자’라는 교훈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손해도 아닌 셈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행동한 배경에는 ‘내가 싸고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는 걸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라는 신조가 있었는데, 그런 신조가  확고히 존재한다면 살아가면서 후회할 일은 줄어드는 것 같다. 그런 신조하에 취한 행동을 더 요령 좋게 잘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나 결과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겠지만, 선택 자체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게 된다. 만화 ‘3월의 라이온’에는 이지메 당하는 친구를 감쌌다가 다음 타겟이 되어 고통받는 여주인공이 오열하면서도 ‘절대 후회 안 해, 그게 옳은 일이니까’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정도로 강렬하고 올곧은 것까진 아니어도 또렷한 신조나 행동 강령, 혹은 알고리즘은 확실히 가질 가치가 있다. 어쩌면 삶의 의미 자체가 잘 살기에 적절한 신조를 찾아서 쌓아나가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고.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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