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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07. 2022

주워온 물건들의 낙원과 수집 수리가

우리집에선 분리수거일에 필요한 게 보이면 종종 노획해서 닦아 쓰고 있다. 환경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훌륭한 일이다. 다만 누구나 이렇게 하시라고 자랑스럽게 권하기도 뭣한 것이, 100퍼센트 정확히 지금 내가 써야 하는 것이 아닌 물건까지 획득 범위를 넓히기 시작하면 자연히 ‘저런 걸 왜?’ 싶은 것을 어딘가에 저장해두게 되어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우리집의 경우는 손재주가 빼어난 아버지가 ‘고쳐 볼 만한 것’까지 가용한 자원으로 생각해서 물건이 쌓이곤 하는데, 이런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이 심화되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생기면 디오게네스 증후군, 혹은 저장강박증이라 불리는 증상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래도 다행히도 아버지는 일상 생활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니, 문명 붕괴물에서 흔히 나오는 ‘오늘은 아주 쓸만한 물건을 구했군!’하고 잡다한 물건을 모아서 고치는 기술자에 가까운 듯하다. 도저히 쓸 데가 없는 것 같은 물건을 쌓아둬서 어머니를 복장터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세어 보면 정말로 쓸 만한 물건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긴 하다.

일단 가장 쓸 만한 물건으로 뽑을 수 있는 것은 선풍기가 있다. 우리집은 수십 년간 선풍기를 구입한 적이 세 번쯤밖에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집에서 사용된 적이 있는 선풍기는 스무 대는 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이 버려진 것을 수리했기 때문이다. 전에도 글로 쓴 적이 있듯, 선풍기는 정말로 말도 못하게 자주 버려지는 가전제품이다. 복잡하게 조작하거나 관리를 틈틈이 해줘야 하는 물건도 아닌데 어째서일까?

아무튼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버려지는 선풍기를 주워다 고치고 또 고쳐서 필요한 이웃에게 주기도 했고, 그렇게 해도 남는 것 일부는 내가 처분했다. 중고로 하나 팔아보기도 했는데 값에 비해 너무 번거로운 짓이라 포기하고 세 대를 한꺼번에 묶어서 주민센터에 기증한 적도 있다. 상당히 고생스러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환경도 보호하고 이웃도 도운 셈이다. 그리하여 선풍기 고치기란 확실히 훌륭한 취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변이 약간 난잡해지는 문제를 감수할 가치가 있다.

선풍기 다음으로 자주 노획되고 그럭저럭 사용도 되는 것은 청소기다. 특히 다이슨의 출몰 이후로 대세가 된 무선 청소기가 여차하면 버려져 우리집을 거친다. 이건 좀 숙고해 볼 만한 일이다. 끌고 다니는 유선 진공청소기가 버려진 건 몇 번 본 적이 없는데 무선 청소기는 쓰레기 버리는 날마다 있는 것을 보아 전반적으로 내구성 문제가 심각한 게 아닐까 싶다. 아마 1인 가구도 늘고 주거 환경도 나빠지니 작고 가벼운 무선 청소기를 쓰는 게 합리적이라 유행했을 것이고 많이들 쓰는 만큼 많이 버려지기도 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선 청소기의 폐기율은 압도적으로 높아 보인다. 시민 연구 단체 같은 곳에서 못 쓰게 될 때까지의 시간을 조사하면 튼튼한 제품 고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피처폰 시절 충전기처럼 아예 배터리팩을 규격화해버려도 좋겠는데 그건 어렵겠지.

아무튼 일렉트로룩스 제품 중 핸디 청소기가 하단에 합체하는 물건이 이상하게 많이 버려진 시기도 있어서 그것도 몇 대나 써봤다. 그 시기 이후로는 먼지통이 상단부에 있고 연장봉을 사용하는 ‘다이슨 청소기’ 부류가 많이 나타났고, 그것들 중 두 대가 집에 배치되었다. 나는 쿠팡에서 파는 제품을 배정받아 연장봉을 플라스틱 파일로 대강 만들어 썼는데, 그러자니 며칠 후에 아버지가 정확히 그 제품의 부속품인 연장봉과 브러시 등등을 가져와서 내가 만든 연장봉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물건을 찾아내시는 건지?

다만, 이 녀석은 쓰다 보니 충전기에 꽂아놔도 완충된 뒤로 자가 방전되는 문제가 발견되어 퇴출되었고 다음으로 타사의 더 비싼 모델이 들어왔다. 이것은 수리 후 문제가 없긴 했으나, 부속 연장봉도 없고 쿠팡 청소기와 호환도 되지 않는지라 연장봉과 청소기의 규격을 맞추고 견고히 고정할 수 있게 해주는 젠더를 만들어야 했다. 이건 내가 휴지심과 플라스틱 파일 등등으로 어찌저찌 해결했다. 나름대로 보람찬 작업이었다.

이 대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도 주워온 물건을 조정해서 활용하는 일에 제법 호의적인 편이다. 내 손으로 어떤 물건의 가치를 더 높이는 즐거움에 얼마나 민감한가, 그리고 피치못할 상황에서도 돈을 쓰는 대신 수고를 감수할 정도로 인색한가가 이런 ‘수집 수리가’가 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듯한데, 나는 아버지의 유전자 중 그런 즐거움 중추를 비교적 많이 물려받은 모양이다. 게다가 돈도 없으니 수집 수리가가 되기에 맞춤형 인재다. 딱히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긴 하지만…….


버려진 물건의 가치를 발견하고 복구하는 일은 즐겁다



각설하고, 이런저런 노획물 중에서 이런 건 가져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도 있으니, 신발이 바로 그렇다. 몸에 착용하는 것인 만큼 무슨 위험 요소가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우리 동네에선 어쩐지 기이할 정도로 말끔한 운동화가 버려지는 경우가 잦아서 아버지의 레이더에 곧잘 걸리고 만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몇 켤레나 되는 노획품을 꼼꼼이 세척해서 신고 있고, 며칠 전에는 어떻게 봐도 새것인 슬립온을 가져와서 내가 신게 되었다. 이러다 무좀이라도 옮으면 어쩌나 걱정인데 아직 별일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질병 얘기를 꺼내서 말인데, 노획품들 중에서 가장 위험천만했던 것은 전기 면도기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가족의 면도기도 공유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주워온 물건을 검색해보니 나름대로 비싼 물건이었던 데다가, 아버지가 워낙 의기양양하게 잘 소독했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쓰기 시작하고 말았다. 이 역시 다행히도 별 문제는 없었고, 그날 이후로 나는 전기 면도기의 편리함에 중독되어 날 면도기는 중요한 날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심지어 쓰기 시작한지 일주일쯤 후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정확히 내가 쓰는 모델의 보관 케이스를 발견하기까지 했다. 젊은 시절의 간디가 신발 한 쪽을 떨어뜨린 뒤에 재빨리 나머지 한 쪽도 던져버린 것처럼, 누군가가 새 면도기를 장만해서 헌 것을 버리고, 이후에 케이스도 찾아내어 버린 것일까?

어쨌거나 너무 많은 물건이 버려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여기 소개한 것 외에도 노트북이나 자전거, 책장, 무선 이어폰도 주워다 적절히 쓰고 있는지라 득을 보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말짱한 물건이 수도 없이 버려지는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도 잘못된 듯싶다. 쓰지 않는 물건을 팔거나 내다 버리는 것 말고 쉽게 처분할 방법, 처분된 물건을 받는 방법이 보편화되어 물건 주워다 쓰는 게 지금보다는 약간 더 공공연히 말할 일이 아니게 되는 게 사회적으로는 바른 방향이 아닐까?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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