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확산으로 해외 여행은 물론이고 국내 여행도 상당히 어려워진 탓에 호캉스가 유행 중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일이지만, 나는 호캉스를 가본 적이 없다. 당장 갈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가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단언할 수도 없고 가보기 싫은 것도 아니지만, 마치 필라테스나 볼링처럼 나와는 거리가 먼 여가로 느껴진다. 겪어본 적이 없는지라 그 정도의 값을 지불하고 어느 정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모르는 탓도 있고, 호캉스라는 여가 행위의 윤곽이 잘 보이지 않는 탓도 있다.
한편 내 주변에서는 부지런하구나 싶을 정도로 호캉스를 다니는 것 같다. 표현에 은근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들어가 있는데, 이건 그 친구들이 전부 여자라서 나는 초청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아도 모일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된 마당에 굳이 남자까지 불러서 성가신 일을 만드는 것보다는 가까운 동성 친구들끼리 훌쩍 다녀오는 게 압도적으로 낫긴 할 것이다. 나라도 그러겠다. 이해하니까 전혀 아쉽지 않다… 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주변 사람들 얘기나 인터넷에서 흘러다니는 얘기를 들어보면, 호캉스라고 해서 뭔가 엄청난 이벤트를 즐기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호텔에 수영장이나 그럴듯한 레스토랑 같은 게 있으면 적당히 이용하고 놀고, 멋진 방에서 티브이도 보고, 가져간 보드게임도 하고…… 대체로 그런 느낌이다. 평소에 먹지 못하던 것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하나,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호사도 아니다. 요컨대 하루이틀 좀 좋은 숙소로 소규모 엠티를 간 느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친구들끼리가 아니라 혼자 갈 경우에는 대체로 하루키의 소설 같은 시간을 보내고 오는 듯하다. 역시 좋은 숙소에서 부대시설을 즐기고, 잘 먹고 잘 마시고, 원하는 책을 읽거나 원하는 영화를 보고……. 대충 그런 식이다. 대수롭지 않지만 평화로운 여가를 즐기고 오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근래에 들어 상당히 각광받고 있는데, 호캉스 정도면 여기 드는 것 같다.
종영한 인기 교양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호캉스 얘기가 나왔을 때, 김영하 작가는 이를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의 넌더리 나는 광경에서 벗어나 우리가 흔히 동경하는 ‘안정의 세계’로 도망치는 것은 그것만으로 합당하고 즐길 법한 여가 같다. 꼭 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아무래도 호캉스가 그리 잘 맞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집을 떠나 여럿이 숙소로 놀러 갈 때마다 근심 거리와 대면하게 된다. 중학생 시절부터 동행인들의 오락(주로 보드게임)을 책임지는 역할을 자주 맡은 탓인지, 누가 부탁한 적도 없는데 어깨가 무겁다. 자의든 타의든 여행이나 엠티에서 요리를 전담하게 된 사람이 느낄 법한 기분이다. 이걸 사람들이 좋아할까, 분위기나 시간이 잘 맞을까, 진행을 실수하진 않을까, 다른 게 낫지 않을까…… 이런 것들을 고려하다 보면 떠나자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에너지가 마구 고갈된다. 보드게임을 하러 다니는 게 나에겐 일상인데, 그 일상의 고민이 며칠치 한꺼번에 쏟아지는 셈이다. 오래도록 해온 역할이라 나름대로 요령도 있고 계획이 잘 맞았을 때의 성취감도 있지만, 요령을 동원하거나 성취감을 느낀다는 부분에서 이미 말끔한 여가와 치유의 순간은 아닌 셈이다. 여가 중에는 그 여가 말고 다른 보상이 없는 게 맞다.
게다가 나는 고도 근시에 수영도 할 줄 모르고, 체통 없이 물장구치고 놀 수 있을 정도로 밝고 장난스럽거나 그런 척이 남들에게 잘 받아들여질 리도 없는 성격이라 호텔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근사한 광경도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미식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술조차 이제 거의 마시지 않으니, 그럴듯한 이미지와 함께 즐기는 호캉스는 나와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써놓고 보니 정말 재미없는 인간 같군.
그렇다면 혼자서 조용히 느긋하게 즐기는 여가를 생각해 보자. 독서는 어떨까? 이건 한결 마음이 편하다. 내가 평소에도 즐기는 일이고, 행복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째 좀 손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흔히 ‘어디서든 책장을 펼치기만 하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을 독서의 매력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굳이 호텔에서 비용을 지불해가며 즐길 것도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물론 멋진 카페에서만 봐도 독서가 한층 즐거우니 가치가 없는 일은 아니지만……. 게다가 읽을 과제와 자료로 쌓아놓은 책이 워낙 많은지라, 평소에도 무슨 책을 읽을 때 ‘이럴 때가 아니라는’ 죄책감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호캉스라고 그런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영화는 재생 기기의 영향을 크게 받으니까 어디서 봐도 똑같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고, 영화관에선 먹을 걸 자유롭게 가져오거나 옆 사람과 대화할 수 없으니, 그런 관점에선 바로 영화야말로 주변 신경 쓸 일 없는 호텔에서 만끽하기에 가장 좋은 여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영화는 내 밥벌이와도 상관없고, 꼭 봐야하는데 못 봐서 쫓기는 느낌을 주는 리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봐야 하는 것’ 말고 ‘보고 싶은 것’이 많을 뿐이다. 그러니 호캉스와 나의 완벽한 접점이란 큰 화면으로 소리 높여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호캉스에 기대할 것이 생겼으니 이제 돈과 시간과 여유만 챙기면 만사 해결인데, 가만히 앉아서 글만 쓴다고 누가 어디서 그런 것들을 챙겨주진 않으니 돈도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조금씩 저축해 놔야겠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혼자 창작의 심해에 잠수하는 프리랜서는 숨쉴 틈을 알아서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주변에서 여자들끼리 호캉스를 다니는 것을 보고 ‘그럼 어디 나도 남자들끼리 호캉스를 가 볼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았다. ‘그딴 쓸데없는 짓을 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호캉스가 무슨 데이트도 아닌데 어쩐지 이유 없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남자 몇 명이 모였을 때 ‘케이크 다 먹고 아쿠아리움 구경 갈까?’ 같은 흐름이 잘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경우가 아닌 일을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꼭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닌 듯, 검색해보면 남자끼리 호캉스 가는 게 어떻냐는 질문이나, 그걸 우습게 나타낸 영상, 그래도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후기 따위가 제법 나온다.
여기엔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제약이 강하게 작용하겠으나, 그것과도 살짝 다른 느낌이다. ‘호텔’이라는 개념에 알게 모르게 씌워진 고급한 성적 이미지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현상의 이유로 ‘남자는 실제 가능성 자체와 무관하게 연애 가능한 상대와 접하는 시간에 무의식적으로 가중치를 두고 투입 가능한 자원을 산정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갖고 있는데, 어쩌면 훌륭한 학자가 이미 연구 결과를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쫓기는 기분이나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느긋하게 쉴 수만 있다면 인원 구성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호텔 측은 남자들끼리, 혹은 홀로 즐기는 호캉스를 전폭적으로 홍보해서 그게 어색하거나 이상하다는 느낌을 구시대의 낡아빠진 인식으로 만들어주길 바란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