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삐딱선이라고 해야 할지 청개구리 기질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주변에서 뭐가 크게 유행하면 대상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고, 심지어 대상을 낮잡아보게 되곤 한다. 예를 들어 나는 해리 포터가 영화로 유행할 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유치하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시청을 거부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지의 제왕으로부터 명맥이 이어진 ‘고전 판타지’ 계열만을 ‘진짜’라고 여겼던 나로서는 분명 할 만한 생각이긴 했다. 다만 지금에 와서는 남들 볼 때 봤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것도 사실이다. 남들과 추억을 공유하지 못할 때의 소외감이 상당히 씁쓸한 탓이다.
그건 그렇고 왜 그런 청개구리 기질이 생겨서 ‘저 포도는 실 거야’, ‘신 포도나 먹다니, 뭘 모르는군’ 같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된 것일까?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보자면 어릴 때 뭘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한 적이 많았던 탓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릴 때는 다마고치 따위 장난감을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그때마다 열등감 같은 부정적인 심리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신 포도’식의 합리화를 했고, 그게 습관적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에 반기를 드는 청개구리가 되고 만 게 아닐까? 남들이 즐기는 것을 나도 서슴없이 즐길 만한 여유가 있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맛을 보면 된다. 그런데 돈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없고, 심지어 지금은 시간조차 없으니 내가 동참해서 즐길 수 없는 것을 폄하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게 되었다는 게 나의 가설이다. 잘 생각해보면 주변을 돌아봐도 이런 신 포도식 사고방식이나 언어 습관을 가진 사람중에 ‘시도할 여유’가 넘쳐흐르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요컨대 여유가 없으면 사람이 옹졸해진다는 말이다. 슬프게도.
요즘은 이 신 포도식 사고방식이 별로 그렇게 합리적인 방어 기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고, 남들 다 본다는 것을 보지 않으면 이래저래 손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해서 유행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가급적 따라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남들이 종종 해리 포터 얘기를 하면서 즐거워할 때 아무 감동도 없이 멍하니 주변인으로 남아있는 게 지겹고 씁쓸해서 해리 포터도 영화로 다 봐버렸고, 요즘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얘기가 많이 보여서 시간이 날 때마다 보고 있다. 말이나 글로 영화 평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극찬을 하는 ‘헤어질 결심’도 보았다.
그런저런 유행을 따라잡는 시도를 하면서 느낀 점은, ‘유행할 만한 것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별 이유도 없이 부당하게 유행하는 콘텐츠는 없고, 유행 중이라면 무엇이 되었든간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배울 점이 있어서 언젠가는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처음 틀어보고 ‘자폐인이 나오니까 틀림없이 감동과 신파로 점철된 내용이겠군’하고 감정 소모를 피해 시청을 포기했는데, 좀 참기로 각오하고 계속 봤더니 대체로 경쾌하면서도 씁쓸한 맛을 잘 섞어놓은 법정 로맨스 드라마였다. 이런 것이라면 그냥 즐기기도 좋고, 잘 소화해서 뭔가를 배우기도 좋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소외당하거나 금전적 손해를 입게 되는 건 아니지만, 자진해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최소한 주변 사람들과 잡담을 나눌 거리는 될 테고.
여담으로 ‘헤어질 결심’ 역시 무슨 장르인 줄도 모르고 아무 기대 없이 보았는데, 내가 애정하는 ‘저 여자가 남편을 죽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끌린다’류의 세련된 변주였다. 스토리가 좋은 것은 물론이고 박찬욱 감독의 작품답게 무척 아름다워서 보는 내내 감탄하고 영화관에서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VOD로 본 덕에 중요한 부분을 돌려본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압도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작품은 역시 스크린에 몰입해서 볼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니 일정 기간만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야말로 유행의 아이콘 같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덕분에 유행하는 건 유행할 때 즐기는 편이 좋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었다. 내가 본 것이 나를 이루는 만큼 남들과 다른 것을 즐김으로써 더 특별하고 훌륭한 존재가 되려는 시도도 아름다운 일이긴 하지만, 요즘 세상은 남들과 다르고 훌륭한 뭔가를 찾으려다 방황한 끝에 유튜브의 광대한 함정에 걸려 시간을 잃어버릴 확률이 너무 높다. 그러니 대체로 남들을 따라다니다 종종 한눈을 파는 게 콘텐츠 소비의 왕도가 아닐까?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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